조창원 (趙昌遠, 1583년 ~ 164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척이다. 삼녀 장렬왕후 조씨가 능양군의 배필이되면서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에 봉작되었다. 본관은 양주(楊州)이고 자는 형보(亨甫), 대형(大亨)이고, 호는 오은(悟隱), 시호는 혜목(惠穆)이다. 당적(黨籍)은 서인 산당이다.
생애
영사(領事) 문강공 조말생의 후손으로, 호조판서와 중추부지사를 지낸 조존성(趙存性)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세의 나이로 아버지 조존성을 따라 종군하였다. 아우 조계원(신흠의 사위, 조사석의 부친)과 더불어 이항복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음서로 출사하여 1601년(선조 34) 별좌(別坐),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15년 신경희의 옥사[1]에 아버지 조존성이 연좌되어 화를 입자 관직을 그만두고 시골에 내려와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3월 반정이 일어나자 형조좌랑에 제수되어 관직에 복귀했고, 1631년(인조 14) 직산현감(稷山縣監)으로 나가 민심을 무마하고 세금과 조세를 감면하여 많은 치적을 올렸다. 그 후 내직으로 돌아와 군자감정(軍資監正), 여산군수(礪山郡守) 등을 지내고 인천부사(仁川府使)로 나갔다.
1638년(능양군 16) 10월 26일, 능양군의 배필을 뽑는 삼간택에서 삼녀(장렬왕후 조씨)가 최종 간선되어 차기 왕비로 정해지자 우선 돈녕부 도정에 제수되었다가[2], 명호가 정해진 11월 1일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이 되고 처 최씨는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 됐다.[3]
1646년(능양군 24) 2월 30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했다.[4] 사후 우암 송시열이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묘소
사후 본적인 양주에 장사됐다. 현종 4년(1663년)에 부인 최씨가 사망하자 금천(金川)에 이장되어 합장됐다가, 현종 9년(1668년) 왕명 아래 용인 동침동으로 다시 이장됐다. 이후 고종 37년에 새로 조성하는 능의 해자(垓字) 구역 안에 있는 무덤들을 옮기면서 다시 이장됐는데[5] 이후의 정보는 미상이다. 이에 따라 현재 조창원 부처(夫妻)의 무덤 위치는 명확하지 않고, 충청남도 보령군 오천면(鰲川面) 오천성(鰲川城, 충남도 기념물 제9호) 부근의 남산에 지석(誌石)이 발견되었으나 묘는 찾지 못하였고. 실제 묘로 추정되는 또 다른 묘는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다.
가족 관계
대사간 최철견의 딸 전주 최씨와 혼인하여 1남 3녀를 낳았다. 이 중 외아들인 장남 조윤석(趙胤錫, 광해 7~현종 5)은 1642년(능양군 20년) 진생원시를 모두 급제한 뒤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 등 여러 음직을 거치다가, 효종 7년(1656년) 병신별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지 등을 역임했다. 조윤석의 처 신 안동김씨는 김수인의 딸로, 김수인은 서인 산당의 거두 김광현(노론 초대 당수 김수항의 당숙)의 아들이자 효종비 인선왕후의 외종오빠이며,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오빠인 강문명의 처남이다. 장녀는 인조반정 당시 서인 당수였던 전 영의정 신흠의 차남이자 선조의 부마 신익성(정숙옹주의 남편)의 아우인 신익전과 혼인하여 5남 3녀를 두었는데, 이 중 차녀가 인조의 서장자 숭선군의 처가 된 영풍군부인 신씨(동평군 모친)다. 차녀는 현감 한정상에게 출가했으며, 삼녀는 능양군의 배필이 된 장렬왕후 조씨다.
능양군 때에 곤위(坤位, 왕후(王后)의 지위를 말함)가 오랫동안 비어 있으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태임(太任)ㆍ태사(太姒)를 길러낸 올바른 가문의 규수를 골라서 내치(內治)를 주관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고(故)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소민공(昭敏公) 신(臣) 조존성(趙存性)의 손녀이며 인천 부사(仁川府使) 신(臣)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를 맞아들여 배필 장렬 왕후(莊烈王后)임)로 삼았다. 배필을 맞이하는 글이 완성되자 부사(府使, 인천 부사 조창원을 말함)의 벼슬이 도정(都正)으로 승진하였고 책봉하는 가례(嘉禮)를 치르자 또 품계가 승진하여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고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봉해졌다. 이에 공은 국구(國舅, 사위의 장인)로서 총애를 받는 자리에 있음을 마치 매우 놀란 듯이 여겼고, 또 시사(時事)에 변고(變故)가 많았으므로 항상 깊은 연못에 다다르고 살얼음을 밟듯이 몸을 낮추어 처신하다가 나이 64세로 집에서 졸(卒)하였다.
공은 재상(宰相)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상순(祥順)하고 근후(謹厚)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공에게서 부잣집 아들의 버릇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10세 때에 어버이를 모시고 구란(寇亂)의 와중에 지내면서 좌우에서 잘 주선(周旋)하여 그 마땅함을 잃지 않았으며, 30여 세에 진사(進士)가 된 뒤 처음 벼슬에 나서 세 번 별좌(別坐)를 지내고 한번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을 지냈다. 그 당시 정치가 혼란하고 이륜(彛倫)이 무너지어 공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하였으며 소민공(昭敏公, 조존성)도 또한 엉뚱한 무함에 걸려들었으므로 공이 교외(郊外)에서 받들어 모시면서 더욱 당세에 벼슬하려는 마음이 없어졌다.
능양군이 개옥(改玉, 반정을 말함)하여 서료(庶僚)들을 신중하게 간선(簡選)하였는데, 이때 공은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그 당시 형란(刑亂)을 겪은 무렵이어서 옥사(獄事)를 심리(審理)하는 문서가 매우 번다하였는데, 공은 공평하고 관대하게 완화함으로써 임금의 신화(新化)를 도왔다. 이어 직산 현감(稷山縣監)으로 나가서 성심[赤心]으로 백성들을 무마(撫摩)하니 유랑하고 도망한 자들이 모조리 돌아왔고, 수년이 지나자 정치가 제대로 다스려지고 공을 칭송(稱頌)하는 말이 일어났으며, 얼마 뒤에 소민공이 세상을 떠났다. 공이 전에 직산에 재임할 때 임금이 품복(品服)을 하사하여 포상하였고 이어 승서(陞敍)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제(服制)를 마치자 즉시 불러들여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제수하였다. 조정 신하들의 논의가 여산(礪山)이 호서(湖西)의 경계에 있는 암읍(巖邑)이라고 여기어 공에게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공은 그곳에 부임하여 법령을 분명하고 자세히 밝히니 호강(豪强)하고 교활한 자들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임기가 차서 떠나오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한번 더 유임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에 간사한 백성들이 난리를 틈타 어지럽게 모여들어 고을 창고를 부수고 곡물을 노략질하였는데, 공이 그들을 잡아다가 법대로 치죄(治罪)하니, 온 경내가 순탄하게 의뢰(依賴)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때부터 벼슬살이가 즐겁지 아니하여 이윽고 그만두고 돌아와서는 전사(田舍)를 배회(徘徊)하면서 닭을 키우고 기장을 심어 일생을 마치려고 계획하였는데, 조정에서 공의 이전 재능을 기억하고서 인천 부사(仁川府使)에 제수하였으니, 이때가 무인년(戊寅年, 1638년)이었다. 그해 겨울에 대혼(大昏, 장렬 왕후의 가례(嘉禮)임)을 치렀는데, 공은 본봉(本封)으로서 총관(摠官)과 제조(提調) 등의 별직(別職)을 더욱 관장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연초에 병으로 드러누워 그해 2월 30일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장례는 관청에서 전례에 맞게 도와주었다.
공은 성품이 진지하고 성실하여 겉을 꾸미거나 명리(名利)에 가까운 행위를 부끄럽게 여겼고, 부모를 효성과 정성으로 섬기었으며 아우와 여동생에게 우애하고 종인(宗人)들과 화목하는 일에도 각각 그 성의를 다하였다. 관직을 담당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인서(仁恕)를 근본으로 하고 위엄(威嚴)도 함께 갖추었기 때문에, 간사한 자를 적발하더라도 사람들이 지나치게 꼼꼼히 살핀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호강(豪强)한 자를 제거하더라도 사람들이 부질없는 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재임하는 곳마다 모두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일찍이 일을 처리하는 방에 ‘근민 사무(近民使無)’라고 편액(扁額)을 걸었는데, 이것은 공이 뜻을 내보인 것이다. 위호(位號)가 높아진 뒤에는 말하기를, “나는 포의(布衣)로서 부귀(富貴)가 갑자기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으면 넘칠까 두렵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입는 의복과 사는 집을 예전보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고 집안사람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공가(公家)의 노복(奴僕)이 된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거의 수재(秀才)로 불릴 정도였다.
항상 방 한 칸을 말끔히 청소하고서 담담하게 자적(自適)하였고 조금도 사물(事物)로써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공의 가법(家法)이 이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대왕대비(大王大妃, 장렬 왕후임)께서도 일국(一國)의 모범적인 국모(國母)로서 거의 30여 년 가까이 조심스럽게 신칙하고 공경히 순종하기를 마치 하루같이 하였으며 오랫동안 낙화궁(樂和宮)과 낙융궁(樂融宮)에 있으면서 성자 신손(聖子神孫)을 낳으시어 효성과 덕망이 더욱 드러났으니, 옛날의 성왕(聖王)들이 반드시 현덕(賢德)한 집안에서 배필을 구하여 종묘를 계승한 것은 그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저 그 문족(門族)을 살피지 않고 덕(德)과 색(色)의 경계에 어두운 자들에 비하면 어떠하다 하겠는가?
공의 자(字)는 대형(大亨)이고, 상조(上祖)인 조잠(趙岑)은 고려 때에 판원사(判院事)에 추증되었으며 대대로 한양(漢陽)의 향교동(鄕校洞)에 살아 왔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자 판원사의 손자인 조의(趙誼)는 집을 버리고 이사하여 끝까지 벼슬하지 않았다. 그 아들 조말생(趙末生)은 중망(衆望)이 있었고 벼슬이 영사(領事)에 올랐으며 시호(諡號)는 문강(文剛)이다. 그 장자(長子)는 조찬(趙瓚)이고, 그 5대손인 조남(趙擥)이 차자(次子)인 조근(趙瑾)의 현손(玄孫)인 조연손(趙連孫)의 후사(後嗣)가 되었는데, 이분이 소민공(昭敏公)의 선고(先考)이다. 소민공은 도사(都事) 이신충(李藎忠)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두 내외(內外)의 문지(門地)가 엇비슷하여 다른 문족(門族)은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다.
공의 부인(夫人)은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대사간(大司諫) 최철견(崔鐵堅)의 딸인데, 완산 부부인(完山府夫人)에 봉해졌다. 부인은 시집오기 전에 집에 있으면서 곤범(壼範, 부녀자가 본받아야 할 규범을 말함)을 외웠고 공에게 시집온 뒤에는 시부모를 공경히 섬겼으며, 세 조정을 거치면서 궁문(宮門)에 통적(通籍)하였으되 궁중에 출입(出入)하는 말을 한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근세(近世)의 어진 부인을 꼽을 때면 부인이 반드시 그 안에 포함되었다.
공은 처음에 양주(楊州)에 장사지냈다가 계묘년(癸卯年, 1663년 현종 4년) 10월 25일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금천(金川) 땅으로 옮겨 부장(祔葬)하였고,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또 용인(龍仁)의 동침동(銅鍼洞) 축좌(丑坐) 자리로 이장(移葬)하였다. 금상 전하(今上殿下, 현종)께서 태상(太常)의 논의에 따라 공에게 혜목(惠穆)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부인은 향년이 81세였다. 아들 조윤석(趙胤錫)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이고, 장녀는 참판(參判) 신익전(申翊全)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현감(縣監) 한정상(韓鼎相)에게 시집갔으며, 우리 대왕대비는 그 막내딸이다. 승지 조윤석은 1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조태상(趙泰相)이고, 딸 중에 셋은 참봉(參奉) 구문수(具文洙), 심기(沈機), 이언시(李彦蓍)의 아내가 되었고 나머지 둘은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 참판 신익전은 5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신정(申晸)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차남 신섬(申暹)은 별검(別檢)이며, 3남은 신창(申昶), 4남 신엽(申曅)은 진사(進士)이고, 5남은 신앙(申昻)이며, 장녀는 교리(校理) 이혜(李嵇)의 아내가 되었고, 차녀는 왕자(王子) 숭선군(崇善君)의 부인으로 뽑혔고, 3녀는 윤지빈(尹之贇)의 아내가 되었다. 현감 한정상은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한종건(韓宗建)은 진사(進士)이고 그 다음은 한종운(韓宗運)과 한종적(韓宗迪)이며, 장녀는 생원(生員) 김정신(金鼎臣)의 아내가 되었고 차녀는 아직 어리다.
내가 약관(弱冠)의 나이에 공을 횡서(黌序, 성균관을 말함)에서 뵈었는데 공은 얼굴이 풍만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기상과 모습이 후덕하고 완전하여, 멀리서 바라보더라도 위인(偉人) 장자(長者)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공의 아우인 판서공(判書公) 조계원(趙啓遠)과 아들인 승지 조윤석이 일찍이 명문(銘文)을 나에게 부탁하였기 때문에, 내가 이미 차례에 따라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논(論)한다.
공의 질박한 행실은 아들인 석경(石慶)과 석건(石建)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치제(治第)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순리(循吏)) 황패(黃覇)와 공수(龔遂)에게도 견줄 만하였다. 공이 왕실의 인척으로 귀한 몸이 되어서는 겸손 간약하고 공경 검소하여 끝까지 훌륭한 명예를 보전하였으니, 옛날에도 그 짝할 만한 자가 드물었다. 이것은 내가 사사로이 하는 말이 아니니, 후대에 이곳에 와서 비문을 읽는 자들은 아마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조씨는 고려 때에 처음 양주에 관적(貫籍)하여 그 유래가 오래 되었네. 공(公)과 후(侯)를 대대로 배출하였고 왕실과 혼인도 맺었네. 공주에게 장가들어 신분이 귀해지고 소민공(昭敏公, 조존성)에 이르러 더욱 가문을 빛내었네. 공은 태어날 때부터 기이하여 단정하고 관후하였네. 남들은 꾸미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나 공은 검소하고 질박함을 좋아하였네. 남들은 빛내고 매서움을 숭상하였으나 공은 결점을 감춰주고 포용하였네. 대가(大家)의 유서 깊은 가업을 이로써 잘 보전하였네. 성명(聖明)께서 정치에 힘쓰시어 공을 누차 고을에 시험하였네. 소부(召父)와 두모(杜母)처럼 사람들은 공이 더디게 왔다고 칭송하였네. 전일(專一)하여 두루하지 못했으나 어찌 이것이 공의 병통이겠는가? 그 덕이 이미 후하였으니 보답을 받은 것이 아름다웠네. 성녀(聖女)를 독생(篤生)하였으니 방가(邦家)의 경사였네. 궁궐에 간택되어 들어가니 그 광채가 크게 드러났네. 성주(聖主)가 나의 사위이니 명복(命服)이 찬란하였네. 남들은 공을 영예롭게 여겼으나 공은 감당하기 어려움을 걱정하였네. 전전 긍긍 조심하기를 애꾸눈의 말이 깊은 연못에 다다른 듯 몸을 삼갔네. 귀신이 들어주어 순전한 복을 내려주었네. 순전한 복이 무엇인가? 덕음(德音)에 하자(瑕疵)가 없는 것이었네. 원망하거나 슬퍼한 때가 없었고 칭예(稱譽)하는 곳이 많았네. 죽어서 거두어 돌아가니, 해가 기울어지는 것과 같음을 어찌 탄식하랴? 아우도 있고 아들도 있어 또한 왕가(王家)를 도와주네. 오래 될수록 더욱 창성하니, 그 이치가 무엇인가. 오직 겸손하고 간약하고 오직 삼갈 뿐이고 다른 것은 없네. 나무가 무성한 묘소에 비석을 높이 세웠네. 이 송사(頌辭)를 새기니, 백세토록 닳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