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는 이탈리아의 페사로에서 관악기 주자 아버지와 소프라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14세인 1806년에 첫 오페라 《테메트리오와 폴리비오》를 작곡했다. 4년 후인 1810년에 단막의 오페라 부파인 《결혼 보증서》를 완성하여 베니스에서 초연했다. 이 곡의 성공으로 그는 단숨에 유명 오페라 작곡가로 등장했다. 이때부터 37세가 되던 1829년까지의 20년 동안 그는 수많은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1817년에는 《신데렐라》, 《도둑까치》가, 1818년엔 《이집트의 모세 》가, 1819년엔 <호수의 여인>이 쏟아져 나왔다. 그 대부분은 오페라 부파였으나 《호수의 여인》과 《세미라미데》같은 오페라 세리아도 있었다. 1825년의 《랭스 여행》, 1826년의 《코린트의 포위》, 1827년의 《모세와 파라오》, 1828년의 《오리 백작》으로 새로운 오페라를 이어갔던 로시니는 1829년에 《빌헬름 텔 》을 작곡한 후 갑자기 오페라를 그만두었다. 따라서 불과 37세의 나이에 완성한 《빌헬름 텔》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37년을 더 살았지만 오페라는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1]
이처럼 오페라 작곡을 그만두게 된 이유에 대해 로시니오페라 작곡보다 먹는 일이 더욱 즐겁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농담했는데, 실제 이유는 자신의 작품을 노래할 성악가가 없었기 때문이라 여겨지고 있다. 그의 오페라는 부인 이사벨라 콜브란을 비롯하여, 안드레아 노자리, 조반니 다비드 등대의 주요 성악가에 맞춰 작곡되었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벨칸토 창법을 익힌 성악가들이었으나, 다음 세대의 작곡가들과 성악가들이 벨칸토 창법을 멀리하게 되었기에, 결국 로시니는 오페라 무대를 떠나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오페라 작곡을 그만둔 뒤에도 종교음악과 가곡, 실내악곡 등을 틈틈이 썼으며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성가곡 《스타바트 마테르》가 있다. 사교계의 유명인사로 스페인의 거부였던 돈 바렐라(Don Varela. 17??~1837)는 막대한 액수를 제시하며 로시니에게 이 곡의 작곡을 의뢰했는데 전성기 때만큼 빠른 속도로 작곡을 할 수 없었던 로시니는 그의 재촉에 동료 작곡가 조반니 타돌리니에게 뒷부분의 작곡을 맡겼다. 로시니와 타돌리니가 만든 곡은 로시니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발표의 9년 뒤, 그리고 돈 바렐라의 사후 4년 뒤인 1841년 악보의 출판에 앞서 로시니는 타돌리니가 썼던 부분을 다시 작곡하여 발표했다.[1] 《스타바트 마테르》는 1842년파리에서 초연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그 해에만 30여개 도시에서 연주되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