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고드윈은 고작 생후 11일에 모친을 여의었는데, 이후 부친의 손에서 자라났다. 메리가 네 살 때, 부친 윌리엄 고드윈은 그의 이웃 메리 제인 클레어몽과 결혼했다. 고드윈은 딸에게 자금·학술·교육 면에서 모든 자원을 아끼지 않고 지원해 그가 그의 자유주의 정치 이론에 동참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814년에 메리 고드윈은 부친의 정치적 추종자 중 한 사람, 나중에 남편이 되는 퍼시 비시 셸리와 연애하기 시작한다. 메리의 배다른 자매 클레어 클레어몽과 함께 이 둘은 프랑스로 떠나 유럽을 여행하게 되는데, 그들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메리는 퍼시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 후 2년 동안, 그와 퍼시는 주변의 손가락질과 계속된 자금난을 겪게 되고, 이 와중에 뱃속의 딸을 유산하였다. 퍼시 셸리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해리엇과 사별한 뒤, 이 둘은 1816년 말엽에 혼인하였다.
1816년, 부부는 바이런 경과 존 윌리엄 폴리도리, 클레어 클레어몽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 근방에서 여름을 보낸 것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메리는 그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큰 틀을 구상하였다. 셸리 부부가 1818년에 영국을 떠나 자리잡은 이탈리아는, 그들의 아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는 넷째 아이 퍼시 플로렌스를 낳기 전, 둘째와 셋째 아이를 잃은 곳이다. 1822년에 그의 남편은, 라스페치아 근해에서 항해 중 폭풍을 만나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여 익사하였다. 일 년 뒤 메리 셸리는 영국으로 돌아왔고, 이 때부터 그의 여생을 아들의 양육과 전문 작가로서의 활동에 헌신하며 보냈다.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십 년을 지루한 투병생활로 보냈는데, 그가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사람들은 뇌종양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1970년대 까지의 메리 셸리는 주로 남편 퍼시 셸리의 작품을 출판하는 데 참여한 공로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많은 희곡과 영화로 재구성되고 있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만 대중에게 알려져 있었다. 최근에서야 학계는 메리 셸리가 남긴 자료를 조금 더 포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가치를 인정하였다. 문단에서는 점차 그의 집필 자료들, 특히 역사소설 《발퍼가》(1823)와 《퍼킨 워벡의 행운》(1830), 묵시소설 《최후의 인간》(1826),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두 소설 《로도어》(1835)와《포크너》(1837) 등, 그가 남긴 소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기행문 《1840, 1842, 1843년 독일과 이탈리아 산책》(1844)과 다이어니셔스 라드너의 전기문인 《잡동사니 백과사전》(Cabinet Cyclopaedia)(1829~46) 등 그의 덜 알려진 작품들에 대한 연구는 메리 셸리의 생애 전반에서 정치적 급진주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평가를 뒷받침한다. 메리 셸리는 종종 작품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가정에서나 보여주던 협력과 조화로 시민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선은 부친 윌리엄 고드윈으로부터 물려받은 계몽주의 정치론과 남편 퍼시 셸리의 조력에 기인했으며, 개인주의가 팽배했던 낭만주의의 품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