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인 타흐마스프 1세가 10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했다.[4]
생애
1488년7월 9일, 이스마일의 아버지 하이다르가 백양조의 군대에 패배하고, 그 자신은 전사했다. 그 이후 이스마일의 형들도 연이은 전쟁에서 전사하여 이스마일 1세가 사파비 종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1499년, 12세의 이스마일은 길란의 숲 속에서 나타나 이란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참가하기 시작했다.[2] 그로부터 2년 뒤인 1501년, 이스마일은 타브리즈를 점령하여 사파비 제국을 세우게 되었다. 이후 이스마일은 약 10년만에 이란 고원 북부를 점령하여, 그의 키질바시 세력민들은 그를 거의 신적인 존재로 여겼다. 1510년에는 메르브에 주둔하고 있던 아불 하이르 왕조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을 급습하여 포로로 잡은 뒤에 목을 벰으로서 오랜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메르브 전투)[5] 이를 통해 그는 영토를 아무다리야강변까지 넓힐 수 있었다.[6]
그러나 서부에서는 동부와 달리 이스마일은 승승장구하지 못 했다. 당시 아나톨리아를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은 순니파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시아파를 신봉하던 사파비 제국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더구나 사파비 제국은 그 세력을 꾸준히 넓혀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넘보았다. 이에 셀림 1세는 사파비 제국을 선제 공격했다. 강력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오스만군은 사파비군을 찰디란에서 쉽게 제압한다.(찰디란 전투) 이 전투 후 셀림 1세는 타브리즈를 점령하였다가 철수한다. 이스마일 1세는 이 수치스러운 패배 이후 한 번도 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3]
찰디란 전투 이후 이스마일은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려 애썼다. 그러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다.[2]
1524년3월 23일, 이스마일 1세는 타브리즈 인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그는 아르다빌에 있는 가문의 영묘에 안장되었다.[2] 그의 뒤를 이은 것은 타흐마스프 1세였는데, 그때 그는 고작 10세였다. 이 때문에 키질바시들의 섭정이 시작되었고, 이후 점차 키질바시 세력이 강해졌다.[4] 때문에 이스마일의 후계자들은 16세기 내내 키질바시의 독립에 반대하는 투쟁을 해야했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