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곤(兪漢坤, 1902년 12월 7일~1962년 2월 17일)은 대한민국의 개신교 관련 계열의 항일 독립 운동가로, 경북 경산(慶山)의 토박이 출신이고, 대한제국 경상북도 경산군 진량면 평사리 71번지 생이다.
생애
1902년 12월 7일(1902-12-07), 대한제국 경북 경산 진량면 평사리 71번지 지역의 기독교 신자 집안이자 쇠락한 중농 농가에서 유고미(兪古味)라는 이름으로 출생했으나, 1906년(5세 때)에 유한곤(兪漢坤)으로 개명(改名)했고, 한때 1932년부터 1933년까지 만주국 지린 성 지린 거류 시절에 한후이리(韓慧悧, 한혜리)라는 중국어 가명을 사용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경북 경산 지역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탄압에 굴복한 대한기독교장로회 측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하였고, 그 결과 대부분의 기독교 교회들은 신사참배 예식을 거행해야만 했다.
그러한 가운데 경상북도 경산의 평사교회·상림교회·봉회교회 등의 교회에 소속된 목사 유한곤 영수를 비롯하여 목사와 신도들이 일치 단결하여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는 기독교 성경 구절을 앞세우며 신사참배의 강요에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자 일경들은 이들 교회를 폐쇄시키기 위해 온갖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럼에도 유한곤 등이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급기야 교회 강대상 안에 '조천기도회 강령'이란 제목 하에 대한제국 조선 독립 만세·일본 타도·영미 만세·비밀엄수 등의 글을 써놓은 뒤 이러한 문구가 교인들에 의해 씌여진 것으로 몰아붙이는 간교한 계책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구실 삼아 1943년 11월 17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44년 11월 석방되었다.
사후
-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8년 8월 15일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