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크는 언어를 문화의 결집체이자 문화를 표현해 낼 수 있는 도구로 보았다. 젊은 에스토니아 운동의 멤버로서 그는 에스토니아어가 근대의 모든 문물과 사상을 담아낼 수 있게끔 발전되어야 비로소 에스토니아가 서구 유럽 문명에 소속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아비크는 문법의 정립, 정서법의 확립, 어휘의 개발등을 다각도로 추구하면서 에스토니아어의 체계화와 문체의 세련을 추구하였다. 그가 주도한 에스토니아어의 개혁작업은 1905년에 시작되어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고, 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그의 개혁 작업을 지지하였다.
아비크는 여러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 언어개혁을 꾀하였는데, 명사에서 동사형을 추출해 내거나, 14개에 달하는 에스토니아어의 격을 간소화하고, 긴 단어를 짧은 꼴로 바꾸었다. 또한 기존의 전거없이 임의의 음소에 뜻을 결합한 창조적 조어법이란 방법을 통하여 약 4000개 이상의 새 단어를 만들었으며, 에스토니아의 시골 방언과 핀란드어, 독일어 등의 외국어에서도 적극적으로 외래어를 도입하여 에스토니아어의 어휘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아비크의 개혁 결과 그가 다져놓은 문법의 틀속에서 새로운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가 매년 필요에 의해 생성될 수 있게 조어법이 정비되었다. 그의 개혁 작업은 독일어의 영향 아래 독일어 어순과 거의 비슷했던 에스토니아어가 20년 사이에 어순까지 뒤바뀔 정도로 크고 철저한 것이었다. 오늘날, 에스토니아인들에게 에스토니아어는 에스토니아 문화의 중요한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