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지는 브란덴부르크 서북방 및 폴란드와의 경계점, 그리고 20세기 이후 폴란드로 넘어간 지역 일부를 포함하는 곳이었다. 요한의 영지는 프랑크푸르트의 북쪽에 있는 퀴스트린(Küstrin, 현재의 폴란드코스트신나트오드롱(Kostrzyn nad Odrą). 폴란드와 브란덴부르크가 번갈아 점유하던 곳으로, 독일 동부의 요새였으나 1945년 이후 폴란드령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의 동쪽 지방인 노이마르크, 오데르슈프레, 드람부르크, 스트레인부르크 카운티, 크로스노, 폴란드와의 경계지역인 파이츠(Peitz) 지역, 콧부스 경의 지위 및 콧부스 지역의 주권(Loardship), 그리고 후에 폴란드로 넘어간 크로스노 오드잔스키(Krosno Odrzanskie)와 시비드빈(Świdwin, 후일 폴란드에 속한다.) 등을 포함한 12,500제곱 킬로미터를 물려받았다. 동시에 이미 자신의 거주지로 정한 퀴스트린을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후작령의 수도로 정하고, 퀴스트린 요새와 오데르강 주변의 도시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그의 형 요아힘 2세 헥토르는 선제후의 지위와 나머지 영토를 물려받았다.
다소 사치스럽고 호화로웠으며, 허세도 부렸던 친형 요아힘 2세 헥토르에 비해 그는 검소하고, 신앙심이 깊었으며 종교적이었다. 그는 정치 문제와 경제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후작령의 경제, 문화,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는 물류와 유통, 상거래의 중심지로 지역을 발전시키고 싶어했다. 그는 퀴스트린에 강력한 요새의 건설을 시작했고, 후작령을 관리하는 다수의 행정기관을 설립하고 소수의 귀족, 기사들 대신 평민층에서도 공개적으로 관료를 채용, 기구들을 운영했다. 동시에 정부에 의한 경제 및 금융 지배 구조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무역, 상거래를 활발히 하도록 하는 한편 새로운 세관을 도입하여 신속하게 후작령의 재정을 확보하고, 빠른 시일 내에 브란덴부르크에서 퀴스트린 지역의 경제적 독립을 달성했다. 동시에 정치적, 군사적으로도 자신의 후작령의 영토를 넓히려 하였으며, 한편으로 퀴스트린 후작령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다. 동시에 인적, 물적 요충지를 확보, 신규 건설하여 지역의 시장 경제를 안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거래 및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여 신성로마제국 내 다른 제후국과 도시에서 이주하는 이들이 늘어나, 안정적인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57년까지 계속된 석조 요새에는 16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고, 이들 인부의 인건비로 막대한 돈이 지출되었다. 이는 요한의 사후 고스란히 빚으로 남게 된다.
요한 퀴스트린은 자신의 영지를 둘러싼 요새를 재설계했다. 1568년부터 시작된 요새 재건축은 다섯 개의 석조요새를 건설하는 것으로, 1562년 건축가 그리밀라를 초빙하여 시작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요새의 석조 성벽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성벽 건설은 후일 그의 조카인 요한 게오르크에 의해 재건되어, 1618년에 완공을 보게 된다.
독일의 군주 그룹 중 여러 선제후의 모임의 지원을 받은 작센 선제후 모리스가 아우구스부르크 가신조협정에 거부 의사를 드러냈으며 프랑스가 뒤에서 지원했다. 요한은 이 동맹에 참여하기로 했으나, 한편 1551년 로카우의 안나부르크 성에서 모리스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그와 갈등한 뒤, 요한은 가신조협정 반대 모임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요한의 친척인 프로이센 공작알베르트 폰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영지와 황제 카를 5세간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요한을 황제편으로 설득하기 위해 프로이센으로 초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1556년에는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친척들과의 협의 끝에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