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렐리우스 씨족(gens Aurelia)은 고대 로마의 플레브스 가문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 제정 시대 말까지 번성했다. 아우렐리우스 겐스 (씨족)로서 처음으로 집정관에 오른 것은 기원전 252년에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때였다. 그 시기부터 공화정이 무너질 때까지, 아우렐리우스 씨족은 초창기 황제들 재위 때 상대적으로 무명의 시기를 보내기 전, 여러 유명한 정치인들을 배출해냈다. 1세기 말에,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한 일파가 자신들의 명성을 키워내, 파트리키 지위를 얻어냈고, 마침내는 황제 자리까지 차지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세베루스 왕조 출신들을 포함하여 출생 혹은 입양을 통하여 여러 황제들이 이 가문에 속하였다.[2]
212년에,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카라칼라의 정식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은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 거주자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고, 이 자유민들은 자신들의 후원자를 기념하며 '아우렐리우스'라는 노멘을 쓰게 되며, 이 성을 쓰는 엄청난 수의 새로운 시민들이 출현하는 결과가 일어났는데 이들 중에는 몇몇 황제들이 포함되었고 갈리에누스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부터 11명 중 7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퀸틸루스, 프로부스, 카루스, 카리누스, 누메리아누스, 막시미아누스). 로마제국 말에 이 성이 너무 흔해져서 'Aur.'로 축약되는 일을 겪었고, 단순히 이 이름을 지닌 자들과 아우렐리우스 씨족을 분간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3]
기원
'아우렐리우스'라는 노멘은 '금빛의, 황금의'를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와 보통 연관지어지며, 머리카락의 색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지만, 페스투스는 아우렐리우스의 원래 형태가 '아우셀리우스'(Auselius)이고, 중간의 's'가 상대적으로 초기에 'r'로 바뀌었다고 기록하였다. 동일한 과정이 상고 시대의 노멘들인 '푸시아(Fusia), 누미시아(Numisia), 파피시아(Papisia), 발레시아(Valesia), 베투시아(Vetusia)'에서 발생했는데, 이 성들은 고전 라틴어에서 '푸리아(Furia), 누메리아(Numeria), 파피리아(Papiria), 발레리아(Valeria), 베투리아(Veturia)'가 됐다. 페스투스에 따르면, '아우셀리우스'는 태양을 뜻하는 사비니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4][5]
프라이노미나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주요 가문들이 사용한 모든 프라이노미나는 로마 역사에서 흔한 것들이었다. 공화정 시기에는 주로 '가이우스, 루키우스, 마르쿠스, 푸블리우스'를 썼으며,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티데스 일족은 '그나이우스'를 추가하였다. 제정 시대의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일족은 '티투스, 마르쿠스, 루키우스'를 사용한 반면,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일족은 '퀸투스와 루키우스'를 사용했다.
분가와 코그노미나
공화정 시기에는 '코타(Cotta, Cota), 오레스테스(Orestes), 스카우루스(Scaurus)' 등 코그노멘으로 구분되는 주요 아우렐리우스 일족들 세 개가 있었다. 코타와 스카우루스 등은 '루푸스'(Rufus)라는 네 번째 코그노멘과 함께 주화에서 모습을 보이나, 이 네 번째 코그노멘은 고대 저술가들 사이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페쿠니올라 (Pecuniola)를 포함해 일부 개인적인 코그노멘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기간 아우렐리우스 씨족 중 가난한 이를 나타낸 것으로 추정한다.[2]
공화정 시대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저명한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분가인 '코타' 일족의 성(姓)은 아마 곧추선 머리카락 혹은 제멋대로의 머리칼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지만 어원은 확실치 않고, 또 다른 설명안은 엉망이 된 혹은 '그슬린'을 뜻하는 라틴어 '코크타'(cocta)의 방언에서 유래했을 거로 본다.[7] 기원전 139년에 주화 주조 담당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켄타우루스가 이끄는 쌍두전차(비가)를 타고 있는 헤르쿨레스가 새겨진, 흔치 않은 데나리우스를 발행했는데 아마 아우렐리우스 씨족과 관련된 어떤 신화적 사건을 암시할 것이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상징성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우렐리우스 코타 일족은 제1차 포에니 전쟁부터 티베리우스 시대까지 유력한 이들로, 그 이후로는 모습을 감췄다. 역사에서 등장한 이 일족의 마지막 인물에는 티베리우스의 친우이며 사치로 가문의 재산을 낭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그리고 저명한 선조들의 걸맞게 가세를 유지하기 위해 네로에게서 급료를 받은 그의 아들이 있다.[8] 코타 일족은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 코타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 연관이 있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 일족은 상대적으로 작은 가문으로, 공화정 시기 마지막 두 세기 동안 번성했다. 이들의 성인 스카우루스는 사람의 신체적 특징에서 유래한 코그노멘을 지닌 평범한 계층으로, 부어오른 발목을 지닌 자를 의미한다.[9][10][7]
공화정 말을 앞두고 대략 한 세기간 번성했던 가문인 오레스테스는 그리스식 명칭으로, 외국 기원으로 한 성 계층이었으며, 공화정 중기와 후기에 등장했다.[11] 그리스 신화에서, 오레스테스는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아들로, 어머니를 살해하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고, 에리니에스의 판결에서 벗어난 뒤에 미케네의 왕이 되었다. 이 이름이 아우렐리우스의 분가의 명칭이 된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리스에서 어떤 영웅적 행위나 군사적 활동을 암시한 것일 거이다.[12]
제정 시대에 두드러진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일족은 본래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네마우수스 출신이었다.[13] 풀부스 일족에서 처음으로 집정관에 오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는 대략 서기 73년 혹은 74년에 파트리키가 되었다.[14] 2세기에,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일족은 로마 제국 그 자체가 되는데, 동명의 이 집정관의 손자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가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로 입양되어,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된 것었다. 그 이후의 황제들 대부분은 세베루스 왕조 때까지 이 씨족으로 태어나거나 입양되었다.[13] 풀부스라는 성은 흔한 성씨로, 노란색, 황갈색 머리색깔을 나타낸다.[1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L. f. L. n.) 코타 - 기원전 139년의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이다. 기원전 105년에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자매인 루틸리아와 혼인하여 마르쿠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등 아들 셋을 가졌는데 이들 각각은 74년, 75년, 65년에 집정관이 되었다.[43][6]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L. f. L. n.) 코타 - 기원전 105년의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이고 103년경의 호민관이었다. 그는 호민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에 대한 소추를 막아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어느 해에 법무관을 지냈는데 Broughton은 이 시기를 95년경으로 잡았다. 키케로는 그를 평범한 연설가로 묘사했는데, 루키우스는 스스로를 소박한 이라고 조심스럽게 전하였다.[44][45][1]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M. f. L. n. 코타 - 키케로가 칭송했던, 뛰어난 연설가. 동맹시 전쟁 기간, 그는 동맹시들의 명분을 지지하였고, 이에 따라 기원전 82년까지 추방을 당했었다. 기원전 75년에 집정관이었던 그는 옵티마테스의 분노를 일으킨, 술라의 가장 부담이 따르는 법안 중 하나를 되돌리려 했다. 그는 갈리아의 프로콘술로서 성과에 대한 개선식을 부여받았으나, 식이 열리기 전 오랜 부상으로 사망하고 말았다.[56][57][58][5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 f. M. n. 코타 - 기원전 74년의 집정관의 아들이며, 토가 비릴리스를 거친 채, 아버지를 기소했던 카르보를 아버지가 유죄 판결을 받았던 똑같은 혐의인 속주 내 부당 갈취로 기소하며 복수를 해냈다. 동일 인물로 추정하는, 49년에 사르데냐의 프로프라이토르로 있던 코타라는 성을 가진 이가 카이사르의 군단장 퀸투스 발레리우스 오르카가 도달하기 앞서 아프리카로 달아났다.[68][69][7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 f. M. n. 코타 - 프로프라이토르인 마르쿠스의 아들로 추정하며,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의 아들을 입양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L. f. L. n. 오레스테스 - 루키우스의 형제로, 키케로가 잠시 언급한 연설가들 중 한 명이었다.[88]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L. f. L. n. 오레스테스 -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둔 기원전 103년의 집정관이었다. 오레스테스는 임기 중에 사망했다.[21][91][92]
그나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 기원전 77년의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로, 집정관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의식한 결정문을 내렸다. 레피두스는 이 결정문을 버텨내며, 오레스테스의 결정문을 무효화시켰다. Broughton은 기원전 71년의 집정관을 그와 동일 인물로 보았다.[93][94]
그나이우스 아우렐리우스 Cn. f. 오레스테스 - 역사가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가 입양한 인물로,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 오레스테스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호민관 선출에서 패한 뒤, 그는 기원전 71년에 집정관 자리에 오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키케로는 그의 선출이 그가 사람들에게 뿌린 사치스러운 선물 때문에 그런 것이라 보았다.[95][96][97]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T. f. T. n. 풀부스 - 시간이 흐르고는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보이오니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서기 138년부터 161년까지 로마 황제이다. 서기 120년에는 집정관을 지냈고, 그 뒤에는 아시아의 프로콘술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하드리아누스가 사망하기 바로 직전 그에게 입양되었다.[106][107]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T. f. T. n. 풀부스 안토니누스 -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아들로,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를 입양했을 당시에 그가 살아있는 아들이 없었기에, 서기 138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 틀림없다.[108][107]
마르쿠스 갈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T. f. T. n. 안토니누스 -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또 다른 아들로, 서기 138년 이전에 사망했음이 분명하다.[108][107]
아우렐리아 T. f. T. n. 파딜라 -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이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실바누스의 아내로, 아버지가 아시아 총독으로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107]
안나 갈레리아 T. f. T. n. 파우스티나 -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또 다른 딸로, 친척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혼인하여, 서기 161년부터 그녀가 사망한 시기인 대략 175년경까지 황후를 지냈다. 그녀는 사치와 정치 공작으로 유명했으며, 이에 대해 황제는 받아주거나 최소한 참은 것으로 보인다.[109][110][111][11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조카로, 그에 의해서 서기 138년에 하드리아누스의 계획에 따라 입양되어,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161년부터 180년까지 황제로 있었다.[113][114][115]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로 태어나, 서기 138년에 하드리아누스의 안토니누스 피우스 입양에 따라 그도 안토니누스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161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이 황제로 지목되었고, 169년에 사망할 때까지 재위했다.[116][117][118][119]
푸블리우스 아우렐리우스 페쿠니올라 - 집정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친지로, 친척 지휘 하에서 기원전 252년에 벌어진 리파라 공성전 당시 참전했다. 그의 태만으로 인해서, 그의 주둔지가 불에 휩싸였고 거의 함락당할 뻔했다. 처벌로서, 페쿠니올라는 채찍을 맞았고 군단병 계급으로 강등당했다.[140]
아우렐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켈수스 - 외과의사이며, 아마 아우렐리우스보다는 아울루스라 불렸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기 혹은 1세기 중엽 말에 살았을 것이다. 그는 의학에 대해 과학적 접근법을 접목했고, 8권으로 구성된 그의 치료서인 'De Medicina'는 현재까지 남아있다.[144][145][14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 - 콤모두스의 해방노예로, 콤모두스가 왕실 유지 업무를 맡겼던 이이며, 그 다음에는 제국의 업무 역시도 맡겼다. 그는 매관매직을 하며 부유해졌지만, 서기 190년의 곡물 부족 사태가 벌어지자 당시에 프라이펙투스 안노나이는 그에 대한 폭동을 선동했다. 황제는 총애하던 이를 지킬 어떤 노력도 하지않았고, 분노한 군중들에 죽게 내버려두었다.[155][156][157]
↑His cognomen is guessed by Badian, thanks to the filiation of Gaius Aurelius Cotta, the consul of 200, which shows that both his father and grandfather were named Gaius.
↑가끔씩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 혼동되는데, 스카우루스는 아이밀리우스 씨족의 코그노멘이기도 했다.
각주
↑ 가나Crawford, Roman Republican Coinage, pp. 321, 322.
↑ 가나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vol. I, p. 436 ("Aurelia Gens").
↑Cicero, De Oratore, i. 7, ii. 23, iii. 3, 8, Brutus, 49, 55, 86, 88, 90, Orator ad Brutum, 30, 38, Epistulae ad Atticum, xii. 20, In Verrem, i. 50, iii. 7, De Lege Agraria, ii. 22, In Pisonem, 26.
↑Sallust, Historiae, fragmenta ii., p. 206 (ed. Gerlach)
↑Broughton, vol. II, pp. 86, 88 (note 1), 96, 103, 111, 113.
↑Asconius Pedianus, In Ciceronis in Cornelio, pp. 64, 67, 78 ff.
↑Cicero, In Pisonem, 16, In Verrem, ii. 71, In Clodio, 7, De Lege Agraria, ii. 17, In Catilinam, iii, 8, Philippicae, ii. 6, De Domo Sua, 26, 32, Pro Sestio, 34, Epistulae ad Atticum, xii. 21, De Legibus, iii. 19, Epistulae ad Familiares, xii.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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