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타 제2군단(Legio II Augusta, 아우구스투스의 제2군단)은 로마 공화정 말기에 창설된 제정 로마의 군대의 군단 중 하나이다. 군단의 상징은 염소,[1]페가수스,[2]마르스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재위 시기에 거둔 승전이나 그 기간에 재창설되어 '아우구스타'라는 명칭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3]
공화정 시대
사비나 제2군단 (Legio II)은 후기 로마 공화정 시대의 군사 부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8년에 집정관을 지내던 때 그가 창설했을 수 있다. 폼페이우스와 맞선 군단 중 하나로 기록된, 이들 군단은 이후 기원전 45년 문다 전투에 참전했었다.
앞서 언급한 것이 사실 아닐 경우 제2군단은 집정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가 기원전 43년에 창설한 것일 수 있으며, 사비나에서 징집하여 이러한 별칭이 붙었을 것이다.[4] 이 이론이 사실일 경우, 삼두정치 세력인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편에서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 참전했을 것이다.[5]
공화정 세력이 패한 뒤, 제2군단은 옥타비아누스에 맹세하여[6]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까지 이 맹세가 이어졌고,[7] 이후에 기원전 30년과 14년 사이에 해체된 것으로 보이며 (105,000명에서 120,000명의 베테랑 병사들이 전역)[8] 일부 병사들은 새로운 아우구스타 제2군단으로 통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6]
제정 시대
히스파니아
아우구스투스의 집권이 시작된, 기원전 26년에,[3] 아우구스타 제2군단은 칸타브리아 전쟁을 위해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북쪽으로 옮겨졌다.[9] 이 전쟁은 히스파니아 내 로마의 우위를 결정적으로 이뤄냈다. 히스파니아에 주둔된 기간, 이들 군단은 게르마니카 제1군단과 함께 식민도시 아키의 건설을 도왔다.[9] 또한 도시 카르텐나 건설을 하기도 했다.[3]
게르마니아와 갈리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군단 몇 개가 전멸당하면서, 아우구스타 제2군단이 게르마니아의 추정상 모군티아쿰 지역으로 이동되었다. 게르마니아에 주둔한 동안인, 서기 15년에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게르마니쿠스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을 것이다.[9][3] 게르마니쿠스가 로마로 복귀한 이후로는 아르겐토라툼에 배치됐다.[9] 게르마니아에서 복귀하던 중에, 군단은 폭우와 강한 폭풍으로 피해를 입었다.[3]율리우스 사크로비르 그리고 율리우스 플로루스 등이 갈리아에서 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자, 가이우스 실리우스 휘하에 있던 아우구스타 제2군단은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줬을 것이다.[9][3]
브리타니아
브리타니아 침공과 부디카의 봉기
아우구스타 제2군단은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정복 기간 사용됐던 군단 네 개 중 하나였다.[9] 당시에 아우구스타 제2군단의 군단장은 베스파시아누스였다. 그는 두로트리게스족과 둠노니족에 대한 군사 활동을 지휘했었다. 군사 활동 중에 군단은 브리타니아 남부를 가로 질러 진격하여 여러 부족들과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3]
아우구스타 제2군단은 처음에는 앨체스터에 주둔했었고 서기 49년에는 와던힐로 옮겨졌다.[9] 55년부터 엑서터를 기지로 했고[10] 66년부터는 글레붐에 있었을 수 있다.[11]
네 명의 황제의 해 기간인 69년에, 아우구스타 제2군단의 벡실라티온은 오토 황제의 편에 섰다.[3] 오토가 몰락한 뒤, 벡실라티온은 비텔리우스 측으로 편을 바꾸었다.[9] 이 벡실라티온은 비텔리우스의 로마 진격에 참여했을 수 있으며, 오토의 군단들과 격돌한 크레모나 전투에서 교전했다.[9] 이후 벡실라티온 소속 병사들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에 패했고 70년 로마로 복귀했다. 아우구스타 제2군단의 본대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지속적으로 충성했을 것이다.[9]
브리타니아에서 복무 지속
서기 74년부터 78년까지 브리타니아 총독을 지낸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는 실루레스족에 대한 군사 활동을 벌였고[3] 전쟁 기간에 웨일스의 칼리언 요새가 지어졌는데 이곳을 75년부터 군단이 주둔했다.[9] 군단은 아그리콜라의 브리타니아 총독 임기 때조차도 그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타 제2군단의 일부 벡실라티온들이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에서 교전했다.[3]
139년 군단은 안토니누스 방벽 건설을 도왔다.[9] 155년과 158년에 브리타니아 전역에서 반란이 퍼졌던 기간에, 아우구스타 제2군단은 이 반란을 진압하던 군단 중 하나였다.[9] 브리타니아 군단의 군단들은 이때 큰 피해를 입었고, 게르마니아 속주들에서 보충 병력이 데려와졌다.[9]
196년, 브리타니아 총독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스스로 황제로 선포하였고 아우구스타 제2군단은 그의 주장을 지지하였다.[9] 알비누스의 군단은 황제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패했다. 하지만 로마 군단이 브리타니아에 없는 동안, 브리타니아는 픽트족들의 침입을 받았다.[9] 세베루스 황제는 픽트족들을 막기 위해 스코틀랜드 정복을 시도했고, 세베루스와 픽트족과 교전하던 중, 아우구스타 제2군단은 카르파우 인근 요새에 배치되어 있었다.[9] 언제 아우구스타 제2군단이 '안토니나'라는 별칭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황제에게 이 병사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카라칼라나 헬리오가발루스 시기 때 일어났다,[9]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로마 황제로 있던 기간, 스코틀랜드 정복 계획은 폐기되었고 제2군단은 칼리언으로 복귀했다.[9] 아우구스타 제2군단은 255년에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9] 이 군단에 대해 알려진 마지막 언급은 노티티아 디그니타툼으로 군단이 리스버로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칼리언이 버려졌음을 시사한다.[3]
RIB 2203. 던토서 인근에서 발견된 제2군단의 조각.[12] George MacDonald는 저서 The Roman Wall in Scotland의 2차 편집판에 no. 12이라 칭했다.[13] 정밀 조사를 거친 뒤에 녹화되었다.[14]
RIB 2204. 제2군단의 조각[15] George MacDonald는 저서 The Roman Wall in Scotland의 2차 편집판에 no. 14이라 칭했다.[16]
정밀 조사를 거친 뒤에 녹화되었다.[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