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후인 태녕 2년(324년), 왕돈이 죽고 그가 일으킨 반란은 모두 평정되었다.[4][5][14] 이듬해 사마증에게는 사후 관직이 추증되었고,[2][4][5][15][16] 사마무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초왕(譙王)에 봉해졌다.[2]함화 연간에 산기시랑(散騎侍郞)에 임명되었다가, 둔기교위(屯騎校尉)·중서시랑(中書侍郞)·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여러 번 승진하였다.[2]
사마증을 사로잡은 왕돈은 밤중에 사촌동생 왕이를 보내어 사마증을 함거(檻車)에 싣고 그를 죽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모두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32] 심지어 사마승의 온 집안 사람들조차도 모두 그의 죽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데다가 이 당시 사마무기 형제는 모두 아직 어린 나이였다.[32] 사마무기는 장성하면서 왕이의 아들 왕호지와 서로 매우 가까이 지냈다.[32] 한번은 사마무기가 왕호지와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어머니 조(趙)씨에게 먹을거리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32] 그러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마무기에게 말하였다.[32]
“
왕돈은 옛날에 아무 거리낌 없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는데, 이는 세장(世將, 왕이의 자)의 손을 빌려 그렇게 한 것이다. 내가 여러 해 동안 너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은 낭야왕씨집안이 강성한 데다가 너희 형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인데, 이 일을 널리 알려지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화를 피하기 위함일 뿐이다.
”
이야기를 들은 사마무기는 놀라 소리치며 칼을 뽑아들고 나와 왕호지를 죽이려 하였으나, 왕호지는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32]
함강 8년(342년) 12월, 저부가 강주자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때, 사마무기와 단양윤 환경(桓景) 등이 판교(版橋)에서 그를 배웅하였다.[2] 이때 왕이의 아들인 단양승 왕기지(王耆之)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뜻을 품고 있던 사마무기는 칼을 빼들고 왕기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저부와 환경이 좌우에게 왕기지를 호위하라고 명하여 왕기지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2]어사중승 차관(車灌)은 사람을 멋대로 죽이려고 하였다며 사마무기를 탄핵하였고, 그를 정위에게 넘겨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2] 이에 성제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2]
“
왕돈이 반란을 일으키고 민왕(사마증)이 화를 당하여 사정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인데, 지금 왕(초왕 사마무기)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그러나 공과 사의 법제도 또한 이미 판단해야 할 점이 있으니,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중시해야 하는데, 어떻게 유래를 찾아내어 조정의 법도를 어지럽힐 수 있다는 말인가? 일을 주관하는 자는 법령을 거듭 밝혀 지금부터 죄를 범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처벌해야 할 것이다.
↑《진서》 권37에서는 남군·하동 2군의 태수로 옮겨갔다고 하였는데,[2] 이는 사마무기가 남군태수로 옮겨가면서 본직인 남군태수 이외에도 하동태수도 같이 겸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단, 이 당시 하동군은 후조의 영토였다. 이 하동군은 성제 때인 함강 3년(337년)에 정서장군(征西將軍) 유량이 원래의 하동군이 속해 있던 사주에서 형주로 피난하여 정착한 주민들이 이주해 있던 남군 내 일부 지역(해당 지역은 지금의 호북성형주시의 현급시인 송자시에 해당한다)에 교치한 군이었다.[22] 따라서 본 문서의 하동군은 정확히는 원래 지역에 그대로 있던 군인 본군(本郡)이 아닌 타 지역에 교치된 군인 교군(僑郡)으로 보는 것이 옳다. 자세한 사항은 남군 (중국) 및 중국어 위키백과의 하동군 (교군) 문서를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