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방씨(南陽房氏)는 경기도화성시남양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1세조 방계홍(房季弘)이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올랐다.
기원
방(房)씨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요(堯) 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방후(房侯)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국명을 성으로 삼았다.
당 태종 때 재상인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 578년 ~ 648년)의 둘째 아들이며, 당 태종의 부마도위인 방준(房俊)이 643년(당 태종정관 17년) 고구려보장왕의 주청(奏請)으로 당나라 8학사 중 한 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동래하여 당성(唐城:경기도화성시서신면)에 정착하면서 남양 방씨(南陽 房氏)의 기원이 되었다.
역사
중시조 방계홍(房季弘)이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올랐다. 경기도화성시마도면 청원리의 당성 숭령사에서 향사한다.
방계홍의 아들 방의강(房儀康)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손자 방진유(房珍儒)는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겸하였고, 다른 손자 방정유(房貞儒)는 대광(大匡)을 역임하였다.
분파
남양 방씨는 방계홍(房季弘)을 1세조로 하고, 9세 직제학 방사량(房士良), 장사랑(將仕郞) 방사인(房士仁), 방사보(房士輔)의 아들 대(代)인 10세를 파조로 하여 크게 7개 파로 갈라진다.
사계정사(沙溪精舍) : 전라북도남원시주생면에 있는, 남양 방씨의 선조 방응현(房應賢)이 조선 중기에 처음 세운 정자이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6호.
유천서원(楡川書院) : 1830년(순조 30)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서원으로 방사량(房士良)·방귀온(房貴溫)·안탁(安琢)·방응현(房應賢)·안창국(安昌國) 등 5현을 봉안하여 5현사(五賢詞)라고도 부른다.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52호.
남양방씨 분재기 및 교지․교첩류(8점) : 남원에 세거한 대표적 양반가 남양방씨 문중에는 분재기를 비롯한 교지, 교첩, 소지, 명문, 호적단자 등 100여점이 넘는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중 8점은 17~18세기 자료들이다. 1619년 분재기는 가선대부 방덕유가 적자 1남 1녀와 서자 1남에게 재산을 분급한 것으로 딸에게도 상당히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있고, 시기적으로 임진왜란 직후로 남녀균등상속에서 적장자 위주의 상속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분재기이다. 2016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본관
남양(南陽)은 경기도화성시(華城市) 남양읍 일대의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당성현(唐城縣)이다. 신라가 757년(경덕왕 16)에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쳤고, 822년(헌덕왕 14)에 수성군(水城郡)에 병합되었으나 829년(흥덕왕 4)에 당성진을 설치하면서 분리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당성군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수주(水州)의 관할에 들었고, 후에 인주(仁州)의 영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독립하여 감무를 두었다. 1290년(충렬왕 16)에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익주목(益州牧)이 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가 되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남양도호부가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기도남양도호부의 토성(土姓)으로 홍(洪)·송(宋)·방(房)·박(朴)·최(崔)·서(徐) 6성이 기록되어 있다.[1]
1896년에 경기도남양군이 되었다. 1914년 수원군에 병합되었다가 1949년 수원시가 분리되면서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2001년 화성시로 승격되었고, 시청 소재지는 남양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