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金基錫, 1939년)은 제34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부인 신현우와 2남 1녀의 자녀가 있다.[1]
생애
1939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나 수석 졸업한 서울고등학교[2]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에 치러진 제1회 사법시험에서 합격하여 검사에 임용된 김기석은 전주지방검찰청, 대전지방검찰청, 부산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등에서 검사로 재직하였다.[3] 헌법재판관을 역임한 정경식,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 등을 역임한 이건개 등이 사법시험 동기다.[4] 송종의 대검찰청 차장검사와 대학 및 사법시험 동기다.[5] 대전지방검찰청 천안지청장 등을 역임한 정상림과 서울고등학교와 사법시험 동기다.[6] 과묵하고 빈틈없는 업무처리의 원칙주의자로 알려졌다.[7]
1985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에서 전격적으로 서울지방검찰청 형사부장에 발탁되었던[8] 김기석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재직하던 1993년 5월 29일에 슬로머신 대부 정덕진의 검찰 내 비호세력 파문으로 사임한 신건 (법조인) 법무부 차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9]
검사로 재직하면서 대인관계가 원만한 두주불사형으로 말수가 적지만 한번 마음을 주면 변하지 않아 법조계 후배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1987년 검사장으로 승진한 뒤에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에 아파트를 마련하기까지 20년간 전셋집에서 사는 등 청빈 검사로 알려져 있다.[10] 1993년 9월 공직자 재신 신고에서 김기석은 본인 명의로 서울시 우면동]] 임야 1,904제곱미터 71,780(만원) 개포동 58평 아파트 413,000(만원) 소나타 승용차 10,140(만원) 외환은행 등 2건 예금 71,551(만원) 골프 회원권 10,000(만원)을, 배우자 예금 및 주식 94,966(만원)을, 장남 예금 29,467(만원)으로 모두 588,049(만원)의 재산을 신고했다.[11] 1993년 3월 공직자 재산 공개때 부인 명의의 재산으로 1500만원의 예금만 신고했던 김기석은 그해 9월 신고에서 예금, 주식 등 9500만원을 신고했다.[12]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장으로 재직할 때 가정파괴 사범 단속에 남다른 힘을 기울였던 김기석은[13] 대검찰청 감찰부장으로 재직할 때 대검찰청 강력부장이었던 유길선이 감사원 감사위원으로 옮기면서 1991년 10월 23일에 대검찰청 강력부장을 겸임했다.[14]
법무부 차관으로 재직할 때인 1993년 11월 24일에 산업기술연수생 조정협의회 위원장을 맡아 국내에 불법 취업 중인 외국인 근로자 중에서 자진 신고한 1만 3천여명에 대해 12월 15일까지 강제 출국 시키기로 한 방침을 바꿔 출국을 유예하는 결정을 했다.[15]
1993년 7월 29일에 공무원의 등록재산에 대한 심사, 공개 등을 관항하는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16] 법원조직, 법관인사, 재판업무 등 사법제도 개편안을 논의할 사법제도발전위원회가 1993년 11월 3일 출범하면서 대법원에 의해 위원으로 위촉되어 법무부 차관과 겸직하였다.[17]
국무총리 산하 행정심판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며[18] 법제처 장관으로 재직하던 1996년 5월 16일에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서 1일 교사를 하며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19] 행정심판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1980년 해직 언론인 118명(대표 고승우 등 3명)이 공보처 장관을 상대로 낸 행정심판 청구를 3차례에 걸쳐 심리 일정을 연기했다.[20]
OECD 대사 임명에 따른 부분 개각을 단행할 것이라고 이수성 국무총리가 밝힌 날[21] 서울대학교 근대 법학교육 100주년 기념관 준공식 참석을 마지막으로[22] 법제처 장관에서 물러난 김기석은 1997년 5월 15일에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삼보신용금고빌딩 703호에 김기석 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23]
경력
각주
- ↑ 경향신문 1994년 9월 15일자
- ↑ 경향신문 1994년 12월 24일자
- ↑ 1993년 5월 30일 매일경제
- ↑ 매일경제 1994년 12월 24일자
- ↑ 동아일보 1995년 9월 8일자
- ↑ 경향신문 1997년 3월 1일
- ↑ 한겨레 1993년 5월 30일자
- ↑ 한겨레 1994년 12월 24일자
- ↑ 동아일보 1993년 5월 30일자
- ↑ 동아일보 1994년 12월 24일자
- ↑ 경향신문 1993년 9월 7일자
- ↑ 한겨레 1993년 9월 7일자
- ↑ 한겨레 1994년 9월 15일자
- ↑ 동아일보 1991년 10월 23일자
- ↑ 매일경제 1993년 11월 25일자
- ↑ 한겨레 1993년 7월 30일
- ↑ 한겨레 1993년 11월 4일자
- ↑ 한겨레 1996년 5월 9일
- ↑ 동아일보 1996년 5월 17일자
- ↑ 한겨레 1996년 5월 9일자
- ↑ 동아일보 1996년 12월 20일자
- ↑ 경향신문 1997년 12월 19일자
- ↑ 경향신문 1997년 5월 15일
- ↑ 한겨레 1994년 9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