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엡호아의 재위 기간 동안 청프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고, 프랑스군이 베트남 전장에서 우세를 점하였다. 당시 조정의 권력은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 쩐띠엔타인이 장악하고 있었고, 히엡호아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은 전횡과 발호를 일삼아 히엡호아는 이에 매우 불만을 품었다. 히엡호아는 프랑스인이 제시한 보호 정책을 받아들여 강대한 보정대신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응우옌반뜨엉은 이를 알고 자유태후(慈裕太后)에게 주청을 올렸고, 11월 29일에 정변을 일으켜 쩐띠엔타인을 죽인 뒤 히엡호아를 폐위하고 끼엔푹 황제를 옹립하였다. 히엡호아는 육덕학당(育德學堂)에 감금되었다가 핍박을 받아 독주를 마시고 사망하니, 재위기간은 4개월이었다.
동카인 2년(1887년), 응우옌 왕조 조정에서 논의하여 그를 폐제(廢帝)로 칭하기로 결정하였다.
타인타이 5년(1893년), 논의하여 즉위 전의 작위인 낭국공(朗國公)으로 칭하기로 결정하였다.
주이떤 3년(1909년), 히엡호아를 문랑군왕(베트남어: Văn Lãng Quận Vương / 文朗郡王)으로 추봉하였고, 시호를 장공(베트남어: Trang Cung / 莊恭)이라고 하였다.
히엡호아는 죽은 뒤 승천부(承天府) 향수현(香水縣) 양춘하사(楊春下社)에 장사지냈다. 능묘 앞에 당대에 제작한 묘비가 있는데, 정면에 봉위대남협화황제시장공지침(奉為大南協和皇帝謚莊恭之寢)이라 쓰여 있으며, 측면에는 뜨득 황제의 말인 禦製 吾弟十四人好學者甚少除卻建瑞公今尙存文朗이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