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zyż Komandorski Orderu Wojennego Virtuti Militari - 사후 수여(1971년 9월 1일)
Krzyż Srebrny Orderu Wojennego Virtuti Militari
Krzyż Walecznych – 2번 수훈
Złoty Krzyż Zasługi
Medal Pamiątkowy za Wojnę 1918-1921
Medal Dziesięciolecia Odzyskanej Niepodległości
1939년9월 1일, 나치 독일이 단치히 자유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폴란드 제2공화국을 침공하였다. 폴란드 침공 당시 가장 먼저 공격받았던 곳이 베스테르플라테였기에 헨리크 수하르스키 소령을 포함한 휘하 205명의 주둔군은 독일군에 맞서서 일주일간 버텼다. 당시 주둔군은 205명이었고 75mm 야전포 1문, 스웨덴보포스제 37mm 대전차포 2문, 81mm 스톡스 중(中) 박격포 4문을 보유했다. 또한, 중기관총(Ckm wz.30, 브라우닝 M1917 중기관총 개량형) 16정, 경기관총(Browning wz.1928, 브라우닝 자동소총 개량형) 25정, 소총(G98 개량형) 160정, 권총(Vis 권총) 40정, 1,000여 발 이상의 수류탄을 개인 장비로 보유하고 있었다.
1939년 9월 1일 오전 4시 45분에 독일군의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호가 베스테르플라테 병영에 함포 사격을 가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호가 함포 사격을 한 다음 독일군 해병들이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폴란드군의 박격포, 기관총 사격에 가로막혔다. 첫 날에는 폴란드군 205명 중 1명이 즉사하고 3명이 부상으로 인해 죽었다. 반면 독일군 전투부대 225명 중 16명이 죽었고 120명이 부상을 당했다. 독일군 사상자는 더 늘어날 수 있었지만 수하르스키 소령은 첫 날 박격포 포탄을 아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자 Ju-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가 폴란드군 진지에 폭격을 가해서 박격포와 통신 시설 등이 파괴되었다. 그래서 아껴놓았던 포탄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결국 첫 날, 박격포 포탄 860발 중 104발 밖에 사용하지 못했고 그 뒤로는 영영 사용하지 못했다.
둘째 날의 폭격으로 폴란드군 8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독일군은 폭격을 다 했으니 폴란드군이 전멸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후 독일군은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에 대한 상륙 작전을 중단했다. 폭격과 해상 포격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넷째 날에 독일군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쓰던 노후 어뢰정(노후했지만 함포도 있었다) 2척까지 동원해서 포격을 가했다. 결국 폴란드군 방어벽 두 곳이 파괴되어 남은 부대원들은 반도 북서쪽으로 후퇴했다. 독일군은 폴란드 베스테르플라테 주둔군 본진 가까이까지 점령했다.
다음 날, 수하르스키 소령은 전투신경증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휘하 부대원들을 소집하여 항복 여부에 대해서 회의했다. 전투신경증에 걸린 수하르스키 소령을 대신해서 주둔군 부지휘관이었던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Franciszek Dąbrowski) 대위가 지휘관을 대신했다.
9월 6일에는 독일군이 폴란드군의 본진 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우선 폴란드군의 연료가 저장된 석유탱크로리와 폴란드군이 숨어서 독일군에게 저항할 가능성이 높은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의 숲 지대를 노렸다. 독일군은 기차에다가 인화성 물질을 가득 싣고 폴란드군 석유 탱크로리와 숲을 불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폴란드군은 37mm 대전차포와 기관총 등으로 저항하여서 기차를 이용한 두 차례의 공격은 실패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베스테르플라테 인근의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 완료한 상태였다. 독일군은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와 야포 등을 동원해서 폴란드군 진지에 폭격 및 포격을 가했다. 비록 베스테르플라테 반도는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지만 수하르스키 소령과 동브로프스키 대위 휘하 부대원들의 고군분투는 독일군에게 밀리던 폴란드 제2공화국 전역에 알려졌고 이는 수하르스키 소령의 영웅화에 기여했다.
결국 1939년9월 7일 오전 10시 15분, 수하르스키 소령과 살아남은 폴란드군들은 백기를 들고 독일군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잘 싸웠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웠다. 205명의 폴란드군 중 15명만이 전사했고 53명만이 부상을 입은 반면 3,400명의 독일군 중 약 300~400명의 독일군이 전사 혹은 부상을 입었다. 당시 독일군 지휘관 프리드리히 에버하르트는 이처럼 10배 이상으로 많은 독일군에게 1주일 동안이나 버틴 헨리크 수하르스키 소령이 군모(Rogatywka)와 칼(Szabla)을 찬 채로 항복하도록 하였다. 항복 이후 이들은 독일에 있는 포로 수용소로 끌려갔다.
1945년7월, 수하르스키 소령은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Władysław Anders) 장군이 이끄는 자유 폴란드군 제2군단에 들어갔다. 자유 폴란드군 제2군단은 카틴 학살을 저지른 소련 밑에 들어가지 않은 폴란드군이 모인 곳이다. 전후 폴란드는 소련군이 44년 동안 점령했기 때문에 이들은 폴란드에 안 돌아가고 이탈리아에 주둔해 있었다. 이후 1946년1월 제2군단 6 소총 대대의 대대장을 맡게 되었다. 1946년8월 19일, 복막염으로 나폴리에 위치한 병원에 실려갔다. 8월 30일에 결국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이탈리아바리에 위치한 카사마시아 폴란드군 묘지에 묻혔다. 이후 1971년에 그의 유해는 고국으로 되돌아와서 그가 활약했던 베스테르플라테에 묻혔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도 그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서훈 내역
Krzyż Komandorski Orderu Wojennego Virtuti Militari - 사후 수여(1971년 9월 1일)
Krzyż Srebrny Orderu Wojennego Virtuti Militari
Krzyż Walecznych – 2번 수훈
Złoty Krzyż Zasługi
Medal Pamiątkowy za Wojnę 1918-1921
Medal Dziesięciolecia Odzyskanej Niepodległości
논란
헨리크 수하르스키(Henryk Sucharski)가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반면 그의 부관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Franciszek Dąbrowski)는 유복한 귀족(Szlachta)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정권이 사령관인 수하르스키만 띄워주고 동브로프스키는 상대적으로 외면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수하르스키는 공산주의 정권에 협력 안 하고 자유 폴란드군에 전후 복무했으며 동브로프스키는 폴란드 인민군(Ludowe Wojsko Polskie)에 전후 복무해서 대위에서 중령까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