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3월 23일 시나노국 스자카 (지금의 나가노현스자카시)에서 하라 모사쿠(일본어: 原 茂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 스자카 번의 아시가루 고가시라(일본어: 小頭) 일을 했지만 원래는 농민이었다.
법률 생활
대학 예비문을 거쳐 구제 제1고등학교, 1890년 제국대학 법학대학 (지금의 도쿄 대학 법학부) 영문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동기생으로 시바타 가몬 (제3차 가쓰라 다로내각 문부대신), 이시이 기쿠지로(제2차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 외무대신) 등이 있었다. 제국대학 재학 당시에는 변호사를 지망했지만, 개업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농상무성의 관리가 되었다. 농상무성 사관, 광산감독국의 도쿄·오사카 양광산 감독서장 등으로 일했으며 1893년 농상무성에서 물러났다.
관리직에서 물러난 하라는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1893년 4월 도쿄 교바시에 법률 사무소를 열었고, 광산 소송을 비롯한 여러 민사 소송을 맡았다. 또 하토야마 가즈오, 오가와 헤이키치, 하나이 다쿠조 등과 함께 일본 변호사협회, 국제변호사협회 설립에 참여했다. 1911년에는 도쿄 변호사 회장에 취임하여 3번 더 연임했고, 제1 도쿄 변호사회장을 2번 연임했다. 이 사이 미쓰이 은행, 미쓰비시 은행 등의 법률 자문을 맡았으며 미쓰이 신탁 임원, 미쓰이 보덕회장 등을 지냈다. 또 도쿄 제국 대학, 와세다 대학, 주오 대학, 가쿠슈인 대학에서 상법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1930년 사법대신 사임 후, 주오 대학 학장으로서 일했다.
전쟁 중 도조 내각으로의 권력 집중에 따라 추밀원은 그 기능을 상실했다. 1944년 8월 7일 추밀원 의장 재직 중 하라는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 직후 칙사가 파견되어, 화족으로 추존되었으며, 남작 직위가 추증되었다. 전쟁 이후 귀족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하라는 일본의 마지막 화족 직위 수여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