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티는 산타 크로체 술아르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장학금을 통해 시에나 미술 학원(Accademia di belle arti di Siena)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작업했으며 그의 대표 작품으로 알려진 〈종교 재판에 직면한 갈릴레오〉를 제작했다.[1][2][3]
1854년에 그는 피렌체로 이사하여 예술가들의 주요한 만남의 장소인 카페 미켈란졸로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반티는 이곳에서 마키아이올리 운동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그림에 햇빛의 자연스러운 효과를 담아내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긴 장거리 야외 여행을 떠났다. 특히 화가 텔레마코 시뇨리니는 반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4]
1861년에 그는 콩스탕 트루아용과 카미유 코로에게 수업을 받기 위해 파리로 떠났고, 이후 카스텔프랑코 디 소프라에 정착하여 자연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일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작품을 전시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1870년에 그는 파르마 국립 박람회(Esposizione Nazionale di Parma)의 배심원으로 활동했고 시뇨리니와 불화가 생겼다.[5] 5년 후 그는 파리로 돌아왔고, 1879년에는 영국 미술에 익숙해지기 위해 런던으로 떠났다.
반티는 다른 마키아이올리 예술가들과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많은 비난을 받자, 카스텔피오렌티노 인근의 그의 가족이 있는 빌라로 은퇴했다. 아내가 죽은 후 그는 몬테무를로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마키아이올리의 예술품을 수집하며 보냈다. 이는 당시 반티가 마키아이올리와 대부분 화해를 했기 때문에 예술품 수집이 가능해졌다.[6] 가끔은 마키아이올리 예술가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 대중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우피치 미술관을 재조직하는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7] 1887년에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국립미술관에서 고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였고, 제임스 맥닐 휘슬러를 만났다.
반티는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한 명 이상이 영국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04년 몬테무를로에 있는 자신의 빌라에서 사망했다. 10년 후, 그의 컬렉션은 각종 경매로 흩어지게 되었다.
↑De Lucca, Denis (2015). Tomaso Maria Napoli: A Dominican friar's contribution to Military Architecture in the Baroque Ag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aroque Studies: UOM. p. 254. ISBN978-999-57-0-837-5.
↑Brief biography from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 Volume 5, by Giorgio di Genova @ Treccani.
↑Brief biography from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 Volume 5, by Giorgio di Genova @ Trecc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