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형 이유일이 사촌형 여성군 이해, 여릉군 이기에 연좌되어 그가 인평대군가문의 제사를 받들게 됐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치병과 언어 장애, 청각 장애를 앓고 있었고 1731년 무렵에는 영조로부터 시각 장애를 지적당하기도 했다. 그는 고종의 실제 5대조가 된다.
생애
그는 의원군 이혁(義原君 李爀)의 세 아들 중 차남이다. 1699년 안흥수(安興守)에 책봉되었고 이듬해 1700년 안흥부정(安興副正)으로 진봉되었으며, 곧 안흥정으로 승작했다가 다시 1702년 안흥군(安興君)에 진봉되었다. 본래 출생은 정원군의 삼남(三男)인 능창군 이종의 4대손으로 그의 양자인 인평대군 이요의 증손이 된다.
이숙은 태어나면서 귀머거리에 벙어리였고 나면서부터 불치병이 있어 말로 지식을 전해 줄 수 없었다 한다. 아버지 의원군 이혁은 사물을 만날 때마다 아들에게 손수 가르쳐 주고, 저것을 가리켜 이것을 빗대고, 동쪽으로 인하여 서쪽을 설명하고 열심히 설명하고 마음으로 깨닫고 비슷한 것을 미루어 지식을 확장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아들 안흥군이 모르는 것이 없게 했다.
그는 태어나면서 시각 장애와 청각 장애, 그밖의 불치병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시각 장애도 앓게 됐다. 시각 장애를 앓기 시작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731년의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그의 시각 장애를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1725년 자신대부(資信大夫)가 되었다. 1730년(영조 6년) 1728년의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사촌 형 여흥군 이해, 여릉군 이기 등이 복주될 때, 그의 형이었던 이유일(李有一)도 연좌되었다. 홍치중은 인평대군의 봉사손을 세울 것을 주청했다.
1731년7월 10일명선대부로 승진하였다. 7월 25일부터는 영조의 명으로 인평대군의 제사를 봉사하였다. 그해 9월 18일 천릉집사에 임명되었다. 1737년 5월 24일에는 상중으로 탈상때까지 면직되었다.
그러나 그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영조는 그를 보내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1731년 영조는 김포 장릉에 종실을 파견할 때 "별 탈이 없는 사람으로 적장(嫡長)을 승습(承襲)한 사람은 오직 안흥군(安興君) 이숙(李埱)뿐인데, 저번에 만나 보니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자세히 보지 못하였다. 나와 팔촌 사이인 자는 오직 이 사람뿐이다. 이와 같은 사람을 자손이라고 하며 대신 보낼 수 있겠는가.(無故人承襲嫡長, 唯安興君埱, 而頃日見之, 則耳不能聞, 目不詳覩, 與予爲八寸之間者, 只有此人矣。以如此人, 謂之子孫而替送耶)"라 하였다.[2]
1737년 2월 15일 중의대부(中義大夫)로 승진, 1740년 5월 16일 효종의 존호를 추가할 것을 건의하였다. 1741년 1월 도총관이 되었다가 1월 8일 신병으로 사퇴하였다. 1742년 8월 12일 부총관, 1743년 6월 22일 승헌대부와 7월 2일 숭헌대부를 지냈다. 1744년 서6촌동생 이담(李埮)이 직책을 받지 못하고 선원록에도 오르지 못했다 하여 종부시 관원에게 탄핵당했다. 1751년 10월 12일 가덕대부가 되었다.
1731년 영조 때 그의 형이었던 이유일(李有一)이 여성군 이해, 여릉군 이기에 연좌되었으므로 상신 홍치중의 건의로 그가 특별히 인평대군의 제사를 봉사(奉祀)하게 되었다. 이후 흥록대부에 승진했으며, 1743년 7월 1일 사무역(私貿易)을 금(禁)하는 법령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비변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후에 복관하였다. 1760년 8월 19일 도총관, 1762년 7월 21일 다시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1763년신장풍에 걸려 5년간 투병하다가 1768년4월 7일에 향년 76세로 사망하였다.
한편 안흥군은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 하고 말도 하지 못 하여, 왕에게 입시할 때에는 필담으로 대화했다고 한다.[3]
사후
안흥군은 초상화를 남겼으며 이 중 일부가 후대에 전한다. 분홍색 관복을 착용한 영정과 회색 혹은 옥색 관복을 입은 영정이며, 머리와 수염의 색은 옥색 혹은 회색 복장본 영정이 더 희다. 옥색 혹은 회색 복장을 한 영정은 일본에 있다.
시신은 경기도안성군서운면 청룡리 술좌(戌坐)에 매장되었다. 초장지인 안성 청룡리 근처에는 복평군의 묘가 있었고 복평군의 양자(養子)인 완천군의 묘소는 원래 1730년경기도광주에 있었다가 1740년 청룡리로 이장해와 복평군의 양자(養子)인 완천군의 묘가 그의 초장지 근처에 있었다. 안흥군의 묘소는 2000년대 이후 경기도포천시신북면 신평리 산46-1번지 인평대군 묘소 근처로 이장되었다.
1864년 7월 5일 고종의 특명으로 시호를 의망하여 7월 9일 효정공의 시호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