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준(安邦俊, 1573년11월 20일 ~ 1654년11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 문신, 성리학자이다. 초명은 삼문(三文),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峯)·우산(牛山)·빙호자(氷壺子)·우산병복(牛山病覆)·은봉암(隱峰菴)·매환옹(買還翁)·대우암(大愚庵)·왈천거사(曰川居士)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는 호남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광해군 때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관직에 여러번 제수되었으나 서인 편향의 조정에 출사를 거부하고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웠다. 효종 때 유일로 천거되어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후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당색으로는 서인으로, 김집과 함께 김육의 대동법을 반대하였다. 호남지방의 저명한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사후 1657년(효종 8) 가선대부 이조참판, 1813년(순조 13)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821년(순조 21)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삼원기사 三寃記事》,《기묘유적노랄수사 己卯遺蹟老辣瀡辭》,《사우감계록 師友鑑戒錄》,《혼정편록 混定編錄》,《매환문답 買還問答》,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약상인 《항의신편 抗義新編》, 《이대원전 李大源傳》, 《호남의병록 湖南義兵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은봉 안방준 연보
1573년(선조 6) 11월 20일에 보성군 오야리(梧野里, 보성읍 우산리)에서 태어남.
1583년(선조 16, 11세) 이황(李滉)의 제자 박광전(朴光前)에게 배움.
1586년(선조 19, 14세) 고경명(高敬命)의 제자 박종정(朴宗挺)에게 배움.
1589년(선조 22, 17세) 경주 정씨(慶州鄭氏) 정승복(鄭承復)의 딸과 혼인함.
1591년(선조 24, 19세)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함.
1592년(선조 25, 20세) 임진왜란에 박광전·임계영(任啓英) 의병막하에서 종사관 정사제(鄭思悌)와 안방준이 참모로 활동함.
1596년(선조 29, 24세) 제2차 진주성 전투를 기록한 《진주서사(晉州敍事)》를 집필함.
1613년(광해군 5, 41세) 조헌(趙憲)의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함.
1614년(광해군 6, 42세) 광해군 때 북인당의 폭정을 피해 보성 소뫼(牛山)으로 낙향하여 우산전사(牛山田舍)에서 강학을 시작함.
1616년(광해군 8, 44세) 《호남의록(湖南義錄)》을 집필함.
1622년(광해군 14, 50세) 조헌(趙憲)의 〈동환봉사(東還封事)〉를 편찬하여 간행함.
1625년(인조 3, 53세) 오수도 찰방(獒樹道察訪)에 임명되어 19일 동안 있다가 사퇴함. 사직하고 돌아온 뒤로 한양에 발걸음을 끊음.
1627년(인조 5, 55세) 정묘호란에 창의하여 호남 의병장으로 출병함.
1632년(인조 10, 60세) 스승 성혼(成渾)의 《위학지방(爲學之方)》을 간행함.
1635년(인조 13, 63세) 능주 매화정(梅花亭)에 터를 잡고, 당쟁자료를 모아 《혼정편록(混定編錄)》을 편찬함.
1636년(인조 14, 64세) 병자호란에 창의하여 수백 명을 이끌고 여산까지 진군함. 성혼과 이이(李珥)를 변론하는 장문의 상소를 지음.
1640년(인조 18, 68세) 상소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시국을 비판함.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안중관(安重寬)이며, 처는 경주 정씨 판관 정승복(鄭承復)의 딸이다. 고려 말에 그의 10대조 안원형(安元衡)이 문하시중을 지내고 죽성군(竹城君)에 봉작된 뒤 그의 가계에는 대소 벼슬아치 여러 명이 쏟아져나왔다. 그의 5대조 안민(安民)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세조때 이시애의 난에 순절하고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에 추증되었다. 그런데 안민이 처가인 전라남도 보성(寶城)에 정착한 이래 그의 가계는 보성에서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고조인 안범(安範)은 현감을 지냈고, 할아버지 안축 (조선)(安舳)은 목사(牧使)를 지냈다. 안축은 중종 때 과거에 합격한 이래 많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김인후(金麟厚), 임억령(林億齡)과 함께 어울려 친하게 지냈는데, 일명 '호남의 세 높은 선비'(湖南三高)란 별명을 받기도 했다.
성리학 수학
안축에게는 중관(重寬)·중홍(重洪)·중돈(重敦)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원래 안방준은 장남인 중관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숙부 안중돈이 과거 시험 도중 갑자기 급서(急逝)하였기에 사후 그의 양자로 입양가게 되었다. 일찍이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안방준은 11세 때 퇴계 이황의 제자인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문하에 나가서 성리학을 처음 배웠다. 박광전은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학행이 뛰어나 선조 때 광해군이 왕자 시절 사부를 지내기도 했다. 그 뒤 14세 때 매형이었던 난계(蘭溪) 박종정(朴宗挺, 1555~1597)의 문하에서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안방준의 학문은 대체로 서인 계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첫 스승인 박광전은 동인 계열로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지만 매형인 박종정은 서인 당원이었다. 그 뒤 매형 박종정의 영향으로 1591년 경기도 파주의 성혼선생을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안방준이 성혼(成渾)의 뒤를 이을 탁월한 인재라고 평할 만큼 성혼과 관련이 있었다.
청년기
1591년선조 24) 경기도 파산(坡山)으로 유학,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 찾아가 성혼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조헌을 가장 숭배, 이들의 호에서 포은의 은과 중봉의 봉, 각각 한자를 따서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지었다. 다른 호는 우산이었다.
1592년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보성으로 내려가 옛 스승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교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임진왜란 때의 의병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던 이이첨(李爾瞻) 등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여러번 찾아와 기용하려 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일찍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여 호남지방의 저명한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 뒤 광해군 조정의 출사 요청을 모두 거절한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집권하자 동문이며 성혼 문하에 있을 때부터 교유가 깊던 공신 김류 등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서인 우계 성혼, 송강 정철(鄭澈), 조헌(趙憲) 등의 문하에 출입했던 서인계 사람이었으나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하였다.
인조 반정 이후
1623년인조 즉위 초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고 이후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학문에 전념하였다. 1625년에는 사포서 별제, 오수도 찰방(獒樹道察訪) 등을 제수받았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정묘호란이 터지자 격문을 돌려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병자호란이 터지자 역시 의병을 일으켜 여진족 군대와 교전했다.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 抗義新編》을 출간했는데 서인의 묵재 이귀(李貴)는 이를 읽고 깊이 감동하여 인조에게 국가에서 이를 영인과 간행,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건의하여 보급하였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을 하며 당론을 중단하고 폭넓은 인재 중용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 등을 제수받았으나 서인 내부의 분파 갈등과 소현세자 사건 등에 염증을 느껴 나아가지 않고 사양과 거절을 반복했다. 거듭 상소하여 당쟁을 중단하고 시정(時政)을 개혁할 것을 논하였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후 절의 추승활동을 하였다.
효종이 즉위한 뒤 지방의 유일(遺逸)로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좌의정 조익(趙翼)의 천거를 받아 1649년(효종 원년) 공조 좌랑, 사헌부지평, 1651년(효종 2년) 사헌부장령, 1653년(효종 4)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었지만 출사하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하였다.
1652년(효종 3년) 안방준은 김자점(金自點)이 광양(光陽)에 유배된 뒤로 여러 번 편지를 보내와서 몇차례 왕복 서찰을 보낸적이 있다면서 스스로 죄를 받겠다는 상소를 하였다. 그 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우의정 김육(金堉)이 ‘경기도에 실시하고 있는 대동법(大同法)을 먼저 호서 지방에 시험하고 다음으로 양남(兩南)에 실시하자’는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대해서 여러 대신들은 백성들의 부역을 가볍게 하고 국가의 재정(財政)을 풍부하게 할 것이라 여겼을 것이나 지금 삼남 지방은 계속되는 흉년으로 좀도둑이 들끓고, 난리를 겪고 난 뒤 유랑민들이 산으로 들어가 총으로 짐승을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자가 수도 없이 많아져서, 백성들이 원망과 배반감으로 가득찬 것이 국가의 커다란 걱정인데도, 조정의 신하들은 서울에서 실시할 때 이미 인심을 잃은 대동법만이 오늘날의 제일가는 계책으로 여긴다며 반대했고, 또한 무차별한 유민의 추쇄(推刷)로 인해 유민이 발생하는 이유를 고려하지 않고 추쇄의 명령만 내리면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숨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80 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들어오고 나갈 때를 명확히 하였고, 학문적 경향과 처신에 있어서 절의(義節)을 높이 숭상했다. 일찍이 이이, 성혼, 정철, 조헌 등 서인계 인사들을 사후에 변론했고, 우암 송시열 등에게 존장으로 대우를 받아 정치적으로 서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생각은 달랐다. "'붕당을 혁파하자[破朋黨]’라는 세 글자를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서 항상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쓰면서 오직 이 세 글자를 천명하는 일에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노력했던 분"이라며 칭송했다.
시문도 많이 남겼는데 그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의 활약상과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환경을 서술한 《항의신편 抗義新編》·《이대원전》·《호남의병록 湖南義兵錄》과 당쟁에 관련된 자료인 《삼원기사 三寃記事》, 《사우감계록 師友鑑戒錄》, 《혼정록 混定錄》, 《혼정편록 混定編錄》, 《매환문답》, 《기묘유적노랄수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편저들은 의병사·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사후
1657년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그를 포상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1658년 동춘당 송준길의 증직 상소를 올려 증가선대부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송준길은 그의 도학과 사림이 서원을 건립하여 제향하게 된 사유를 아뢰고 '조정에서도 마땅히 증직하여 포상해야 할 것입니다'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던 것이다.
인조반정 공신인 서인김류, 김자점, 이귀 등과도 친분이 있었고, 비공신인 산림계열 서인 학자인 성문준(成文濬),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등과 두루 친교가 있어 서인 집권하에서는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여러번 천거되었다. 그러나 관직은 사양할 때와 나갈 때가 있었고 병자호란 이후는 거의 벼슬을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다시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에 추증되었고, 순조 때 문강(文康)의 시호가 내려졌다. 전남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 화순 동복의 도원서원(道原書院), 능주의 도산사(道山祠) 등에 배향되었다.
1691년(숙종 17) 남인이 집권했을 때 한때 호남인 정무서(鄭武瑞) 등의 소청에 의하여 그의 사우(祠宇)가 한때 철거되기도 했다. 그는 정철과 함께 서인과 남인 정권의 시각과 입장차이에 따라 상반되는 평가가 내려져 포폄이 반복되기도 하였다.
저서
임진·정유왜란과 관련된 저술 : 「진주서사(晋州敍事)」·「임정충절사적(壬丁忠節事蹟)」·「삼원기사(三寃記事)」·「호남의록(湖南義錄)」·「백사론임진제장사변(白沙論壬辰諸將士辨)」·「부산기사(釜山記事)」·「노량기사(露梁記事)」·「임진기사(壬辰記事)」등.
『은봉야사별록(隱峯野史別錄)』: 은봉이 1627년에 임진·정유왜란과 관련된 저술 속에서 특별히 「임진기사(壬辰記事)」·「노량기사(露梁記事)」·「진주서사(晋州敍事)」등 세 편의 글을 뽑아 편찬한 책이다. 은봉 사후인 1663년 고흥향교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는데, 일본에서도 이 책을 입수하여 읽어오다가 1849년 와타나베(渡邊)가 유호이재(有乎爾齋)에서 재차 간행하여 일본 사회에 유포했다. 이를 가영본(嘉永本)이라 부른다. 일본인들을 「은봉야사별록」을 통해 임진·정유왜란의 전말(顚末)을 상세히 고찰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의 충절(忠節)을 본보기로 삼아 자국인에 대한 정신교육을 하려고 했다. 그만큼 이 책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비중이 높다. 이 책은 1996년에 성균관대 이상익(李相益,1964년생)·최영성(崔英成,1962년생) 교수에 의해 번역되어 한국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하였으나 일찍이 서인 성혼, 정철, 조헌의 제자가 되고 그들, 특히 조헌을 추종하여 정치적 성향은 서인편에 섰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성품이 강개하고 절의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졸기에 의하면 "그는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절의를 숭상하였다. 평생토록 포은(圃隱) 정몽주(鄭蒙周)와 중봉(重峰) 조헌(趙憲)을 사모하여 은봉(隱峰)이라고 스스로 호(號)를 붙였다. 비록 시골에 물러나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여러차례 항소(抗疏)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부름을 받았으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