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케이 신문 재직 중에 《올빼미의 성》(梟の城)으로 나오키상을 받았다.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를 비롯해 역사 소설로 명성을 떨쳤다. 일각에서는 시바 료타로의 역사 소설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위주로 한 편파스러운 서술과 상상력으로 재구성된 허구로서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면도 많다고 평한다.
삶
어린 시절
시바 료타로의 본명은 후쿠다 데이이치이다. 1923년(다이쇼 12년) 8월 7일, 일본 오사카부의 오사카 미나미 구(南区) 난바니시간다 정(難波西神田町, 나니와구 시오쿠사塩草)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약제사인 아버지 후쿠다 고레사다(福田是定)와 어머니 나오지(直枝)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누나와 여동생이 한 명씩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각기병 때문에 세 살 때까지 나라현 기타가쓰라기군(北葛城郡) 다이마 정(當麻町, 지금의 가쓰라기시)에 있는 외가에서 자랐다.
1930년(쇼와 5년) 오사카시 난바 시오쿠사 심상소학교(難波塩草尋常小学校, 오사카 시립 시오쿠사 다테바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성격은 밝았으나 학교 생활을 싫어해서 개구쟁이이기도 했다고 한다.
1936년(쇼와 11년) 사립 우에노미야 중학교(上宮中学校)로 진학했다. 입학 뒤의 성적은 300명 중에 꼴찌에 가까웠고 이에 대해 본인도 놀란 나머지 당황해 공부에 매진해 2학기에는 상위 20등을 차지했다. 이때 읽게 된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의 『이와타 군의 쿠로』(岩田君のクロ)에서 감명을 받았고, 3학년부터 마쓰자카야(松坂屋) 옆에 있던 오쿠라아토 정(御蔵跡町)의 도서관에 드나들기 시작해 오사카 외국어학교(大阪外国語学校)를 졸업할 때까지 온갖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동서고금의 여러 분야에 걸치는 방대한 분량의 서적을 독파하고 난 뒤에는 낚시나 장기와 관련된 책까지 읽었다고 한다. 반은 취미로써 등산을 좋아해 오사카 주변의 명산을 주로 찾기도 했다.
1940년(쇼와 15년)에 구제(旧制) 오사카 고등학교(大阪高等學校), 이듬해에는 구제 히로사키 고등학교(弘前高等學校)를 지망했지만 불합격되었다(고등학교 진학 당시 집안 사정으로 사립으로 진학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공립으로 하라는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다). 1942년(쇼와 17년) 4월에 구제 오사카 외국어학교(大阪外国語学校, 신제 오사카 외국어 대학新制大阪外国語大学의 전신으로 이후 오사카 대학 외국어학부로 바뀌었다) 몽골어학과(蒙古語学科)에 입학하였다. 당시 학생의 대부분이 그러했듯 후쿠다 역시도 어학을 싫어했고 와세다 대학의 중국문학(中国文学)으로 편입할까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독서는 여전히 좋아했고 러시아 문학이나 사마천의 사기를 애독하였다.
1943년(쇼와 18년) 11월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오사카 외국어학부를 임시 졸업(이듬해 9월에 정식 졸업처리되었다)하고 효고현가토군(加東郡) 가와이 촌(河合村, 지금의 오노시小野市) 세이노가하라(青野が原) 전차제19연대에 입대하였다. 군대 내에서 보기 드문 「하이쿠 모임」을 열어 집합 신호에는 늘 가장 늦게 도착하였다고 한다. 이듬해인 1944년 4월 만주 쓰핑의 쓰핑 육군전차학교(四平陸軍戦車学校)에 입교해 12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만주 무단장(牡丹江)에서 전개된 구루메 전차제1연대(久留米戦車第一連隊) 제3중대 제5소대에 소대장으로써 배속되었다. 이듬해인 1945년에 본토결전(本土決戦)을 위해 니가타현을 거쳐 도치기현사노시로 옮겼고, 이곳에서 육군소위로써 패전을 맞았다. 그때 어느 젊은 장교가 미군(연합군)이 도쿄를 공격하러 올 경우 도치기에서 도쿄로 이동해 공격한다는 작전에 「시민과 병사들이 혼란스러워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당시 일본 육군 대본영(大本営)으로부터 와 있던 도호쿠 출신의 소좌참모(少佐参謀)에게 질문했는데, 참모는 「(전차로) 치어 죽이면서 나아가면 된다」[1]고 대답했다(다만 이 문답의 존재 자체는 당사자였던 시바 료타로 본인도 의문을 품고 있다[2])고 한다. 22살이었던 일본군 장교 후쿠다 데이이치, 시바 료타로는 「난 어쩌다 이딴 멍청한 전쟁이나 벌이는 나라에서 태어난 거지? 언제부터 일본인은 이렇게 멍청해져버린 거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옛날의 일본인은 좀 더 성실했을 게 틀림없는데」로써 「22살의 나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으로 소설을 썼다」(22歳の自分へ手紙を書き送るようにして小説を書いた)라고 술회하고 있다. 사노에서의 패전 체험은 그후 시바 료타로의 작가생활의 원점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패전 뒤에는 다시 도서관에 드나드는 생활로 돌아갔다.
기자 시절
돌아온 뒤 오사카 이쿠노구 이카이노(猪飼野) 히가시5초메(東五丁目)8에 있던, 재일조선인 류수현(柳洙鉉)이 운영하던 신세계신문사(新世界新聞社)에 오타케 아키히코(大竹照彦)와 함께 입사하였다가[3]1946년 다시 오타케와 함께 신일본신문(新日本新聞) 교토본사(京都本社)에 입사했다. 동료로는 아오키 신지로(青木幸次郎)가 있었다. 이 무렵부터 30세가 넘어서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 종교 관련 기사를 썼는데 2년 뒤에 회사가 도산하면서 다시 산케이 신문 교토지국에 입사하였다. 입사해서 한 달도 안 되어 1948년 6월 28일 오후 후쿠이 지진(福井地震)이 일어났고, 그날 후쿠이로 취재를 나갔다. 같은 해 11월에는 가인(歌人) 가와다 준(川田順) 실종 사건을 취재했고, 「노년의 사랑」(老いらくの恋)이라는 말을 붙였는데 이것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이듬해 오사카 본사로 이동하였다. 1950년에는 금각사 방화 사건에 대한 기사를 썼다. 이 무렵 교토의 지샤 순례(寺社周り)나 교토대학을 맡아 그 결과 교토의 밀교사원에서 기이한 승려들과도 만났고, 이시야마 전투 때 혼간지 측 군량 조달책의 자손이 운영하던 과자점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교토대학에서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夫)、가이즈카 시게키(貝塚茂樹) 등 교토학파의 학자들도 취재하는 등 훗날의 역사소설이나 에세이를 집필하는 동인이 되는 만남이었다. 이는 훗날 시바 료타로 자신이 쓴 회상기(대부분 『시바 료타로의 생각』司馬遼太郎が考えたこと에 수록)에 실려 있다. 그 뒤 문화부장、출판국 차장을 맡았다.
같은 해에 오사카 대학 의국(医局)의 약제사와 만나 첫 결혼을 하였고 1952년 장남이 태어났다. 그러나 1954년에 이혼, 장남은 친가인 후쿠다가(福田家)에 맡겨 조부모가 양육하였다. 이때 그의 결혼이나 태어난 아들이 있다는 것은 일절 공표되지 않았다.
1955년 《명언수필 샐러리맨》(名言随筆・サラリーマン, 六月社)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필명이 아닌 본명 후쿠다 데이이치로 발표하였고 그 밖에도 「만두전래기」(饅頭伝来記) 등 자신의 본명으로 발표한 작품도 있었다. 나아가 당시 친하게 지내던 나리타 아리히사(成田有恒, 데라우치 오요시寺内大吉)의 권유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 1956년 5월에 「페르시아의 환술사」(ペルシャの幻術師)가 제8회 고단구락부상(講談倶楽部賞)에 응모하는데, 「시바 료타로」라는 이름으로 투고한 이 소설은 당시 소설가 가이온지 주고로(海音寺潮五郎)의 극찬을 받아 수상에 성공하였고, 이 작품이 시바 료타로의 데뷔작이 되었다. 또한 데라우치와 함께 잡지 《근대설화》(近代說話)를 창간하고 이 《근대설화》와 함께 《오모시로 클럽》(面白倶楽部), 《소설 클럽》(小説倶楽部) 등 동인지에 작품 발표를 이어나갔고 1958년 7월에 「시바 료타로」의 이름으로 첫 작품집 《하얀 환희천(歡喜天)》(白い歓喜天)을 출판하였다. 당시 시바 료타로는 야마다 후타로(山田風太郎)와 함께 전기소설(伝奇小説)의 담당자로써 주목받았을 뿐 그가 본격역사소설의 대가가 되리라는 예상은 없었다. 이후 그는 산케이 신문에 「올빼미의 도성(梟のいる都城)」(훗날 《올빼미의 성》으로 제목을 바꾸었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59년 1월 같은 산케이 신문의 기자 마쓰미 미도리(松見みどり)와 재혼하였다. 12월에 오사카시 니시구 나가호리(長堀)의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겼다. 같은 아파트에 난카이 호크스 시절의 야구선수 노무라 가쓰야가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소설 『오사카 사무라이』(大坂侍) 『올빼미의 성』을 발표하였으며, 1960년 『올빼미의 성』으로 제42회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산케이 신문사를 퇴사하고 작가생활에 들어 갔다.
소설가 시절
초기에는 나오키 상을 수상한 『올빼미의 성』이나 『오사카 사무라이』, 『바람의 무사』(風の武士), 『풍신의 문』(風神の門) 등의 장편이나, 단편으로 「페르시아의 환술사」, 「가신거사(果心居士)의 환술(幻術)」(果心居士の幻術), 「나는 가토」(飛び加藤) 등 시대 ・ 전기소설이 많았고, 『돼지와 장미』(豚と薔薇), 『불타는 고찰』(古寺炎上) 등 추리소설도 있었지만 그다지 자신이 없었던지 이 두 작품을 제외하고 추리소설을 쓰지 않았다.
1962년부터 《료마가 간다》, 《타올라라 검》, 1963년부터 《나라 훔친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바 료타로는 역사소설가로써의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에서부터 작가 자신이 작중에 수필 형식으로 개입해 해설하는 기법을 완성시켰다. 1964년에는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될 후세시(布施市) 시타고사카(下小阪, 지금의 히가시오사카시東大阪市)로 옮겼는데, 후에 그는 「외잡스러운 토지가 아니면 살 마음이 들지 않는다」라고 적고 있다. 1966년 기쿠치 간 상(菊池寛賞)을 수상하였다. 그 뒤에도 《나라 훔친 이야기》를 계속 써 나갔고, 《신사 타이코기》(新史太閤記),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 《성채》(城塞) 등의 작품들을 집필하였으며, 이들 네 작품은 센고쿠 4부작이라 불리게 된다.
1971년부터 기행수필 《가도를 가다》(街道をゆく)를 주간 아사히(週刊朝日)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메이지 일본의 인간군상들을 그린 《언덕 위의 구름》의 산케이 신문 연재를 마쳤다. 또한 막부 말기를 다룬 《세상을 사는 나날들》(世に棲む日日)로 요시카와 에이지상을 수상하였다. 초기 시절부터 시바 료타로가 보인 밀교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구카이의 풍경》(空海の風景)으로 결실을 맺었으며(이 작품으로 시바 료타로는 일본예술원 은사상日本芸術院恩賜賞을 수상하였다) 「국민적 작가」라는 타이틀이 정착하기 시작하고, 역사를 조망해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시바 료타로의 관점은 이른바 시바 사관(司馬史観)으로까지 불리며 독자적인 역사관을 쌓아올리고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 중기부터 80년대에 걸쳐 시바 료타로는 메이지 초기를 다룬 《나는 듯이》(翔ぶが如く)나 《나비의 꿈》(胡蝶の夢), 에도 후기를 다룬 《유채꽃의 바다》(菜の花の沖), 센고쿠 시대를 다룬 《하코네 고개》(箱根の坂) 등을 발표했으며, 청 왕조가 흥기하던 시대를 소재로 한 《타타르 질풍록》(韃靼疾風録)을 마지막으로 소설 집필을 그만두고, 《가도를 가다》(街道をゆく)나 한 달에 한 번 연재하던 에세이 《풍진초》(風塵抄), 《이 나라의 모습》(この国のかたち) 등을 쓰면서 일본이란 무엇이며,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문명비판을 행했다.
1981년에는 일본예술원(日本芸術院)의 회원이 되었고, 1991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자로써 인정받아 1993년 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이 무렵부터 시바 료타로는 허리 통증을 앓기 시작하였다(시바 자신은 좌골 신경통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직접 사인이 되는 복부 대동맥 동맥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도를 가다 - 타이완 기행》 취재에 나서서, 타이베이에서 당시 타이완(자유중국) 총통 리덩후이와의 회담 《장소의 비애》를 쓰거나[4] 다시 《가도를 간다》 취재로써 아오모리의 산노우치마루야마 유적(三内丸山遺跡)을 방문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말년에는 노몬한 사건(할힌골 전투)의 작품화를 구상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5]
1996년 1월, 《가도를 가다 - 신비참주기濃尾参州記》의 취재를 마치고 연재 중이던 2월 10일 심야에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국립 오사카 병원(현 국립병원기구 오사카 의료 센터)에 입원하였으나, 이틀 뒤인 2월 12일 오후 8시 50분, 복부 대동맥 동맥류 파열로 끝내 사망하였다. 향년 72세. 시바 료타로가 사망한 날은 그가 생전 좋아하던 유채꽃에서 따온 '유채꽃 기일(菜の花忌)'이라고 불리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국립 오사카 병원은 《꽃의 신》(花神)을 집필한 소설가 오무라 마스지로가 사망한 곳이기도 했다. 집필 중이던 《신비참주기》는 절필된 채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의 매장에는 친족들만이 참석했으며, 3월 10일에 오사카 시내의 호텔에서 열린 '시바 료타로 씨의 장송 모임'에는 약 3,000명이 참석하였다. 법명은 요망원석정중(遼望院釋淨定)이었다. 일본 정부는 시바 료타로에게 종3위를 추사(追賜)하였다.
시바 료타로가 사망하고 이듬해 시바 료타로 기념 재단(司馬遼太郎記念財団)이 발족, 시바 료타로 상이 제정되었다. 2001년 히가시오사카 시의 시바 료타로 자택 인근에 시바 료타로 기념관이 세워졌다. 시바 료타로 기념실(記念室)이 있는 히메지 문학관(姫路文学館)에서는 해마다 8월 7일(시바 료타로의 생일)에 연고가 있는 명사를 게스트로 초정해 「시바 료타로 메모리얼 데이」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NHK 대하드라마로 가장 많이 드라마화된 작품 원작가이기도 한데, 「21세기 스페셜 대하드라마」(훗날 NHK 스페셜 드라마로 변경)라 불리는 「언덕 위의 구름」을 포함해 모두 7개 작품에 이른다.
특징
역사소설가로써는 월터 스콧 이래의 인물 중심주의 사조를 이어, 필명부터 고대 중국의 사마천의 명저 《사기》(史記) 열전의 형식을 빌린 작가이기도 하다.
특징으로는 기본적으로 등장인물이나 주인공에 대해 호의적이며 작가가 호의를 가진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이를 통해 작가는 주인공에 대해 가지는 자신의 공감을 독자와 주인공의 관계로까지 끌어올리고, 스토리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수법을 쓰는 경우가 많다. 또한 역사의 대국적인 서술에 수반된 풍문을 많이 사용해 등장인물을 소묘하거나 다소 돌발적이면서도 객관적인 묘사에 의한 건조한 유머나 여유 있는 인간 긍정의 태도를 보이는 수법은 그때까지의 일본의 역사소설의 전통에서는 볼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하며, 그 작품이 끼친 영향은 크다. 「여담으로……」라는 말에서 보이듯 이야기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에피소드나 시바 자신의 경험담(등장인물의 자손에 대한 취재나 방문한 지역의 묘사) 등을 적절하게 이야기 속에 삽입하고 있어 수필을 읽는 듯한 수법도 시바 료타로 소설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일본의 논평가 가와모토 사부로(川本三郎)로부터는 「이치헤이니타로」(一平二太郎, 후지사와 슈헤이藤沢周平, 시바 료타로, 이케나미 쇼타로池波正太郎)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일본 성인 남성」의 소양으로써 읽어야 할 작가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시바 료타로의 그 독특한 문체는 훗날 와타나베 나오미(渡部直己)나 시미즈 요시노리(清水義範)의 패스티시 대상이 되었으며, 한편으로 사케미 겐이치(酒見賢一)의 『후궁소설』(後宮小説)처럼 그의 문체의 오마주격 작품이 나타나기도 했다.
작품 속 인물의 내면묘사에 그렇게까지 깊게 들어 가지 않기에 '천박하다'고 평가받기도 하며, 장편에서는 주제가 파탄나기도 한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다수의 등장인물을 단번에 써내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시바 료타로의 수법상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존재한다. 특히 내면묘사를 피하는 것은 인간을 외부에서 파악하고 단순화(전형화)해 보이는 18세기 유럽 소설이나 한문 역사서의 영향에 의한 것이 크고 「전형적인 인간」이냐 「전형에서 나름대로의 내면묘사」냐라는 문제는 소설의 형식의 문제(18세기형 소설이냐, 19세기형 소설이냐)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장편의 구성력이 약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앞에서 다룬 「여담인데…」라는 말로 이야기가 새는 경우도 있듯, 예를 들어 소설가 겸 문예평론가 마루야 사이이치(丸谷才一)의 「전체의 3/5는 조잡하다」(全体の五分の三あたりのところから雑になる), 「초반에 나왔던 복선이 후반에 회수되지 않는다」(最初の伏線が後半で生かされない)라는 평도 있다. 다만 이러한 「조잡하다」, 「두서가 없다」가 어느 정도 다듬어진 결과, 다양한 인물이 한 무대에 잇따라 등장해 풍문을 소개하고는 사라진다, 는 '그랜드 호텔' 형식의 소설로써 성공한 것이라 평가받는 작품도 있다(『사람들의 발자국 소리』ひとびとの跫音의 경우). 철학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는 시바 료타로가 소설에서 그린 인물들에 대해 "그다지 이상이나 도덕을 믿지 않는 인간들이다. 이런저런 세상의 단맛 쓴맛 다 보고 다니다 어느새 한 가지 사명에 눈떠 그 시대가 요구하는 어려운 문제를 보기 좋게 해결하고 그다지 보답도 바라지 않고 죽어간다."고 평했다.
작가 시바 료타로의 후반기는 소설 창작에서 벗어나 수필이나 문명 비판 등이 주가 되었는데, 합리적 사고와 구체적 고증에 의한 역사평론을 하기도 했다.
저술
소설
장편소설
(제목, 년도, 출판사, 주요 등장인물 순으로 나열하였으며, ☆표는 한국어 번역이 있는 작품)
☆《달단질풍록》(韃靼疾風録, 1987년 주오코론샤) - 중국 청(淸) 왕조의 건국자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등. 명청교체기의 중국의 모습을 일본 히라도번 출신의 가쓰라 소스케(桂庄助) 관점에서 묘사한 작품. ※영문 번역판 제목은 《The Tatar Whirlwind》(Joshua Fogel 역)
『훤화초운』(1968년、도호샤) - 표제는 막부 말기의 화가 다자키 소운(田崎草雲)의 기구한 인생을 그렸다.
☆『고향을 어이 잊으리까』(故郷忘じがたく候, 1968년、문예춘추) ※ -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도공 심수관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시바 료타로의 작품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생존중인 인물(심수관)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었다. 문춘문고로 재판.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외가 주위로 고분이 많았고, 토기(土器) 파편이나 돌화살촉 등을 줍기도 했다. 또한 당시 소년 치고는 특이하다고 할 점은 아니었지만 대륙의 마적(馬賊)을 동경하기도 했다. 훗날 전차 부대의 소대장이 된 것도 그의 어린 시절 꿈의 결실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의 《월간중앙》 보도에 따르면 중학교 1학년 1학기의 영어 독해 시간에 뉴욕이라는 지명이 나오자, 시바는 교사에게 "이 지명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라고 물었는데, 교사는 시큰둥하게 "지명에 무슨 의미랄 게 있더냐"라고만 반응했고, 시바는 이에 기어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지며 '뉴욕'이라는 지명의 어원과 유래가 영국 국왕의 동생 요크 공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알아냈고, 이후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고 한다. 시바의 아내인 부인 후쿠다 미도리는 남편을 두고 "보통의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생각할 기력이 없어진다. 시바 료타로는 반대였다. 혼이 점점 젊어진 듯했다."라고 회고하였다.[6]
중학교 시절 온갖 종류의 책을 독파하는 와중에 근처 아베노(阿倍野)에 있는 백화점의 도서 코너에서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 전집》(宮本武蔵全集)을 서서 읽기로 모두 독파했다고 한다. 늘 찾아오면서 책을 사지도 않고 서서 읽고 가기만 하는 그에게 매장 주임이 「우리 매장이 무슨 도서관인 줄 아느냐?」라며 불평하자 「거기서 여기 있는 책을 다 사 줄 테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구제 오사카 외국어학교 입학 당시 교내 식당에서 상급생이 신입생을 맞이하는 환영회에서는 상급생이 게다짝에 목검이나 죽도를 휘두르면서 목청껏 고함 치고 호령하면서 훈시를 하거나 군가(軍歌)를 지도하는 관행이 있었다. 시바 료타로는 이때의 환영회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맡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성격이 얼마나 밝았는지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구제 오사카 외국어학교에는 시바 료타로의 2년 후배인 쇼노 준조(庄野潤三, 영어학과), 1년 선배인 진순신(인도어학과), 동기인 아카오 도시(赤尾兜子, 중국어학과) 등의 「창작 클럽」도 있었는데, 시바 료타로는 그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대학 당시의 시바 료타로는 하얗고 통통한 얼굴의 동안이었는데 구제 고등학교를 동경해 게다를 신은 채 등하교했다고 한다. 교실에서는 「읏차, 읏차」하는 소리를 내며 들어왔고 생도간에 인기 있는, 늘 사람이 모여드는 중심이었다. 수업에서도 자주 발언을 했다. 식사는 잘 했으며 아침 식사는 보통 다섯 그릇 넘게 먹어치웠다고 한다. 당시 시바 료타로의 좌우명은 「중용(中庸)의 덕(德)」이었다.
쓰핑에서의 육군전차학교 시절 일화로, 문과 계열로써 기계에 약했던 시바 료타로는 한 번은 전차를 움직이려고 이곳저곳 조작하다가 엔진이 기동했으나 그 속에서 갑자기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자 놀라서 「도와주십시오!」라고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고, 코드가 전차에 연결되어 전류가 흐르고 있는 와중에 손도끼로 코드를 끊어 무사했다고 한다. 전차학교에서의 성적 우수자는 다른 부대로 전출되어 실제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성적이 우수하지 않은 경우는 그대로 대륙에 배속되었고 시바 료타로 역시 성적이 우수하지 못한 부류로 분류되었는데, 이것이 시바 료타로의 생사를 갈랐다.
산케이 신문 입사 당시, 산케이 신문으로부터 「외국어대를 졸업했다니 영어 정도는 할 수 있겠군」이라며 입사 권유를 받았는데, 정작 시바 본인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응해 산케이 신문 교토지국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대중 구명 활동
1980년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대중이 내란 혐의로 신군부에게 사형을 선고 받자 시바 료타로는 당시 일본 총리스즈키 젠코에게 편지를 보내 구원에 나서 달라고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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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만약 본토결전이 실행되었다면(もしも本土決戦が行われたら)」, 주오공론사(中央公論社) 잡지 『역사와 인물』(歴史と人物) 증간「태평양전쟁 종전비화」(太平洋戦争-終戦秘話), 1983년 8월(통권제150호)에서. 당시 전차제28연대의 중대장이었던 곤도 신지(近藤新治)는 「그 이야기는 우리들 사이에서도 큰 문제였습니다. 시바 씨와 같은 부대에 있었던 사람들 누구도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한 사람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라고 진술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 쇼와사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와 같이 출판업계에서 역사 문제를 길고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이(시바의 담당자를 맡은 적도 있다)들의 경우는 이 발언을 믿고 있으며 일본 제국 육군 비판의 소재로 사용하는 이도 있다. 한도 가즈토시는 《NHK 인간강좌 한도 가즈토시편 - 세이초 씨와 시바 씨》(NHK人間講座.半藤一利 清張さんと司馬さん, NHK출판 2001년 10월、개정판 2002년 10월/ 문춘문고, 2005년 10월), "무서운 말이지요. 도망치고 있는 무저항 민중을 작전에 방해된다고 「치어 죽이면서 가라」고 하다니. 그런 소리를 군을 지휘하는 「대본영 참모」가 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시바 씨의 질문에 답한다거나 하는 것을 제가 듣거나, 전해들은 적은 없어요. 이름까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제게는 당시 참모본부 작전과의 수재참모 누구누구의 얼굴들이 막 연상이 되는 겁니다."(恐ろしい言葉です。逃げてくる無抵抗な民衆を、作戦の邪魔になるから「ひき殺していけ」と言う。それを軍を指揮する「大本営参謀」が言ったというのです。しかも、司馬さんの質問に答えてなんですから、また聞きとか、伝聞とかではないんです。名前まではさすがに出されていませんでしたが、わたくしには当時の参謀本部作戦課の秀才参謀たちのいくつかの顔が思い浮かんできました。) 등, 추측을 어느 정도 가미한 기술도 있다. 한편 다른 부대 관계자에게 사실 확인을 요하는 취지의 기술을 한도는 하지 않았다.
↑리덩후이는 시바와는 같은 세대의 애독자였고, 이 대담은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 시바는 1989년에는 한국 서울에서 노태우 대통령과의 대담도 가졌다(《문예춘추》文藝春秋 1989년 8월호).
↑《도쿄신문》(東京新聞) 칼럼 「필세」(筆洗) 2007년 4월 30일자에서. 해당 칼럼을 쓴 한도 가즈토시는 시바의 유지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시바 료타로 사후 《노몬한의 여름》(ノモンハンの夏)을 저술했고, 후기 『세이초 씨와 시바 씨』(清張さんと司馬さん)에서 시바 료타로의 심정을 추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