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나베 고등학교 시절인 1961년 1학년 때 예비 투수로서 하계 고시엔 대회(제43회 전국 고등 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아키타 상업고등학교와의 1차전에서 마무리 투수로 기용됐지만 0대 1로 패하여 탈락했다.[2] 그해 가을부터 팀의 에이스로 추계 규슈 대회 결승에서는 가고시마교쿠류 고등학교에게 완봉승을 거두면서 우승했다. 이듬해 1962년 춘계 선발 대회(제34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지만 1차전에서 나카쓰카 마사유키가 소속된 PL가쿠엔 고등학교에게 패했다.[3] 그해 여름에는 미야자키현 예선 결승에서 미야자키 공업고등학교에게 0대 1로 졌고, 1963년 여름에도 역시 미야자키현 예선 결승에서 다카하시 히로시, 오가와 도루가 소속된 미야자키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했다.
1964년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와카바야시 다다시 수석 코치의 지도로 컨트롤을 익히고 1년 차부터 11경기에 선발 등판했지만 역시 안정감을 잃었고, 이듬해 1965년에는 주로 중간 계투로 기용됐다. 1966년에는 이나오 가즈히사의 쇠퇴로 인해서 선발진에 들어갔다. 개막 이후부터 호조를 유지하고 그해 6월 12일 고쿠라 구장에서 열린 긴테쓰 버펄로스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지만 시즌 5승에 그쳤고 이듬해 1967년에도 4승에 그치는 등 부진을 겪었다.
1968년에 다카기 다카시, 기쿠카와 쇼지로와의 맞트레이드로 긴테쓰에 이적, 1년 차부터 팀의 4선발로 활약하여 6승을 올렸다. 1969년에는 시즌 18승을 기록했고, 이후에도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는 등 스즈키 게이시에 뒤를 이어 우완 에이스격으로 활약했다. 그 사이 1969년에는 최고 승률 타이틀을 획득, 1972년에는 팀내 최다인 19승을 올렸고 8월에는 3경기 연속 완봉승(16일 도에이전, 22일 니시테쓰전, 27일 난카이전)[4]과 시즌 2.36의 평균 자책점으로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석권했다. 1969년과 1970년에는 2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하지만 긴테쓰가 리그 최하위로 떨어진 1973년에 자신의 투수 성적도 급격하게 하락했고 오타 고지, 이모토 다카시 등 젊은 투수들의 활약도 있어서 점차 기회가 줄어들었다. 1976년에 현금 트레이드로 한신 타이거스에 이적했지만 시즌 중반에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