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케 히데시(일본어: 三宅 秀史, 1934년4월 5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오카야마현고지마군고토우라정(현: 구라시키시)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1966년부터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는 등록명으로 미야케 노부카즈(三宅 伸和)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은퇴 이후에는 三宅 培司를 사용했다.
오카야마 현립 난카이 고등학교(현: 오카야마 현립 구라시키와슈 고등학교) 시절에는 3학년인 1952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는 오카야마 현 예선의 결승전에서 오카야마 히가시 고등학교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나 동 주고쿠 대회에서 돗토리현의 돗토리 현립 사카이 고등학교에 패배해 고시엔에 출장하지는 못했다.[1] 고교 시절에는 2루수였다.[1]
오사카 타이거스에서는 프로 3년차부터 주전 3루수로 활약하며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지닌 유격수 요시다 요시오와 함께 ‘철벽 3-유간’을 구성하며 당시부터 수비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다. 1957년에는 리그 최다인 31개의 2루타를 날리며 활약했고 같은 해 베스트 나인을 획득했다. 1958년에는 타격에 눈을 떠 타율 2할 6푼 7리, 홈런 21개, 도루 35개를 기록했다. 이후에도 두 자릿수 홈런과 도루를 기록하며 맹활약하지만 3루수 베스트 나인은 나가시마 시게오가 독점했다.
1962년 9월 5일까지 882경기 연속 출장과 700경기 연속 전 이닝 출장(2004년에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기록을 경신했으며 한신 구단 등록 선수로서의 기록도 가네모토가 2007년에 경신)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1] 그러나 다음날인 9월 6일에 경기를 앞두고 가와사키 구장에서 연습을 하던 중 고야마 마사아키의 캐치볼의 송구가 야마모토 데쓰야의 미트를 크게 빗겨나가 그 공이 미야케의 왼쪽 눈을 강타했다. 이 사고로 인해 미야케는 안구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따라서 1.5였던 시력이 0.1까지 하락했으며 이것이 선수 생활을 끊기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1] 이후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고 결국 1967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친정팀인 한신의 코치를 역임했다.
2004년 8월 1일에 가네모토가 연속 경기 전 이닝 출장의 신기록을 갱신 했을 때 가네모토에게 꽃다발을 증정했다.
《애제의 3루수 미야케 히데시》(히라오카 야스히로 저)에 따르면 히라오카가 야구 인생에서 후회되는 점이 있냐고 물어보자 미야케는 “그게…. 많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
만담가인 쓰키테이 핫포가 한신의 팬이 된 계기는 미야케와의 만남이었다. 쓰키테이가 안과에 입원해 있던 미야케와 만나 사인을 요구하자 미야케는 그의 눈동자를 응시한 채 “야구를 좋아하십니까”라고 말하며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오카다 아키노부는 어릴적 미야케와 캐치볼을 했던 경험이 있고 미야케를 동경해 후일 한신에 입단하자 같은 등번호인 16번을 달았다.[1] 이외에도 한신의 팬은 아니지만 탤런트 에이 로쿠스케가 미야케를 좋아하며 미야케와 같은 등번호인 16번의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고 한다.
플레이 스타일
3루 수비 실력은 일본 야구계에서도 최상급으로 수비의 명수로 알려져 있었다.[2] 그 플레이는 쉬운 타구를 선방해 보이는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어려운 타구를 미야케는 다이빙 캐치 등을 하지 않고 모두 정면에서 잡아냈다고 한다.[2] 기본에 충실한 플레이로 오버스로로 던져 정확하게 송구했으며[2]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2] 화려함은 부족했지만 어떤 어려운 타구의 처리라도 파인 플레이로 연결해 신의 조화라고 할 수 있는 수비는 팬은 물론이고 적장인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조차 “미야케와 나가시마의 수비는 어른과 어린이 정도로 다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같은 시기의 한신의 유격수요시다 요시오와의 ‘철벽 3-유간’이나 2루수 가마다 미노루까지 가세한 ‘내야 철벽 수비’는 ‘일본 야구계 최고의 수비’라는 평가를 받으며 심지어는 “시합 전의 노크에서도 돈이 잡힌다”라고 할 정도였다(다만 1루수였던 후지모토 가쓰미나 도오이 고로의 수비는 세간의 평가처럼 능숙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또한 빠른 발도 가지고 있어 주전으로 정착한 이후부터 캐치볼 사고로 중상을 입었던 1964년까지 매년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했다. 특히 전 이닝 출장을 기록하고 있던 시기에는 매년 25도루 전후로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타격은 눈에 띄는 성적을 남기진 못했으나 베스트 나인을 획득한 1957년에는 리그 최다인 31개의 2루타를 날리기도 했다. 타격에 눈을 뜬 1958년 이후부터 1964년까지 매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비율은 낮지만 펀치력이 있는 타격으로 고야마 마사아키는 “마음껏 휘두르는 좋은 스윙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타구는 일품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
상대팀에서 붙인 별명은 ‘고양이’였는데,[2] 이것은 미야케가 주루시에 소리도 내지 않고 전진과 수비에서도 태연하게 파인 플레이를 보여주는 점, 성격이 차분했다는 점에서 붙여졌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