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문병호는 군사정권하에서 학생운동 지하서클 활동을 하였다. 1981년 군부독재정권이 조작한 ‘반파쇼 학우 투쟁선언 사건’(무림사건)으로 체포됐고 강제징집 당했으나 이전 학생운동 과정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에 심각한 허리부상을 당했다. 이로 인해 훈련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고 퇴소조치 되었다. 대학에 복학한 뒤, 문병호는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문병호는 서울대학교 법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1년 10개월 동안 법전과 씨름한 끝에 제28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1989년 노동자들이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던 인천 부평에 최초의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 2개월 동안 시국사범 7건, 노동분쟁 10건을 무료 수임하면서 인권변론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아파트 단지에서 오수관이 터져 오수가 난입하는 사건에서 시공회사를 상대로 변론을 맡아 아파트 주민에게 피해 보상을 해주는 등 시민의 편에서 권익을 보호하는 데 앞섰다. 또한 경동산업사건,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 구속사건을 해결했다. 문병호 변호사는 사무실 내 무료상담소를 12년간 운영하면서 산재, 해고 등 수천 건의 사건을 해결했다. 이밖에 인천참여자치연대 공동대표와 ‘개혁과 희망의 지방자치를 위한 인천시민의 힘’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다.‘부평미군부대 공원화추진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서 미군부대 이전을 위한 시민운동을 주도했다.
제17·19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인천 부평갑에 출마하였지만, 새누리당 정유섭 후보에게 26표차로 뒤쳐저 낙선했다. 문병호는 4월 20일 선거무효소송과 당선무효소송을 제기하였고, 법원이 문병호 후보가 제기한 투표지 보전신청을 받아들였고, 1차 재검표결과 3표가 늘어나 23표로 줄었으며, 판정보류표가 26표가 나와 2차 재검표 할 예정이었으나, 최종적으로 낙선확정이 되었다.[1]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미래통합당 영등포 갑 후보로 전략공천되었다. 하지만 38.28%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2위로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