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이에타다는 각지의 전투에 종군하는데, 전투 자체보다는 하마마츠성, 마키노성 (스와하라성) 신시로성, 요코스카성, 또 타카텐진성 공격의 부성 (전선기지) 등 성곽의 보청과 보수 등에 종사함을 보아, 토목에 재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영국에 있던 코우타가와가 빈번하게 범람하여, 그 복구를 행하는 기술이 『이에타다 일기』에 쓰여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생긴 능력이로 생각된다.
덴쇼 18년 (1590년), 이에야스가 관동으로 이봉되자, 무사시국사이타마군에 1만석을 받아, 오비성[2]을 본거지로 삼게 되었다. 원래 오비는 이에야스의 4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가 10만석으로 받은 것이지만, 아직 어렸기에,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에타다가 맡았던 것이다. 그 후, 타다요시가 정식 성주가 되자, 다시 시모우사국 오미가와[3]로 이봉되어, 카미다이성 (현재의 카토리시 사쿠라이)를 본거지로 삼았다. 통칭으론 마타하지(로)였지만, 덴쇼 20년 (1592년)즈음부터 토노모노스케로 칭했다.
이에타다는 자신의 일기인 『이에타다 일기(家忠日記)』의 저자로도 알려져있다. 이것은 덴쇼 3년 (1575년)부터 분로쿠 3년 (1594년) 10월까지의 17년간의 기록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결하게 적은 일기이다. 원본은 이에타다의 적손자인 에도시대 초기 후코즈 마츠다이라가의 당주 마츠다이라 타다후사가 보수한 것이 보관되어 현존하고 있다.
내용은 날씨나, 계절의 담담하고 일상적인 것과, 전쟁 등 정치와 정세, 외교에 관한 기술도 많이 있다. 사건이나 날시에 대한 자신의 감상, 촌평 등은 거의 쓰여있지 않지만, 노를 감상하거나 렌가나 다도를 즐겼다는 기술이 있어, 이에타다의 문화인적 성격도 나타내고 있다.
오다 정권에서 도요토미 정권으로 바뀔 당시의 정세에서 이에야스는 동쪽에 5개 국을 영유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입장이며, 『이에타다 일기』의 기술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센고쿠, 아즈치모모야마 시기의 정치 정세를 알 수 있으며, 카이 타케다씨나 사가미 고호죠씨 등 도쿠가와씨와 외교, 적대 관계에 있던 다이묘 가문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 주목 받고 있다. 또한, 일상적 기술 부분도 해당 시기의 무가나 다이묘들의 상태, 일상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면,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흑인인 야스케에 대해서, 코슈 정벌의 귀국 도상에 목격해 "이름은 야스케, 신장 6척 2푼, 흑인 남성, 몸은 먹과 같다(「名は弥助、身の丈六尺二分、黒人男性、身はすみのごとく」) 등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흑인임을 알 수 있고, 또, 야스케의 신장 역시 알 수 있다. 그리고, 덴쇼 8년 (1580년) 6월 15일에 개기월식이 발생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어, 이에타다 뿐만아니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월식을 관측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장기의 현존최고(最古)의 국면도가 일기에 등장하고 있다. 단지, 국면이 그려져 있을 뿐, 이에타다가 둔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마스카와 코이치에 의하면 대국자는 상당히 약한 기력이며, 실력은 적당한 정도 일 것이라고 한다
또한, 원본 내용과 메이지 30년 (1897년)에 나온 사지업서본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책의 내용은 차이가 있다고 도쿄대 이와사와 요시히코가 지적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