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는 식민지화 되기 이전에는 복잡한 왕국들로 난무했다. 주로 피그미족이 살았는데, 현재는 반투족의 이민으로 흡수되었다.
1895년, 카이저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 제국은 이곳을 식민지로 삼았다. 차례차례 부족 왕국들을 다 점령한 셈이다. 그러나 독일이 지배했던 시기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지배했다.
결과
독일군들은 이상한 내용을 만들었다. 독일인들은 분리된 두 민족이 있는 곳을 시사하기 위한 신화적인 정교한 건축물을 세웠다. 이는 1918년 이후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인들이 계승하였다. 이것은 결국, 르완다의 신식 학교에서 부유층들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것이 1990년르완다 내전의 원인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1919년 이후 벨기에가 르완다의 새 주인이 되었지만, 직접적이고 거칠었다. 벨기에군은 소수 집단인 투치족의 상류층들과 후투족을 분열시켜서 효과적으로 지배했다. 즉, 강제 노동 정책들과 무거운 세금은 투치족 상류층에 의해 실시되었고, 이것이 후투 족 분노의 원인이 되어, 1994년 내전당시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하는 만행의 바탕이 되었다. 많은 젊은 농부들은 높은 세금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간다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1990년, 우간다에 숨어 있었던 RPF가 르완다에 침입했다. 내전 기간 동안, 르완다 정부 고관(대부분 후투족)은 비밀스럽게 '인테라하므웨(Interahamwe)'라고 불린 비공식 무장 단체들을 조직해서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라디오 방송으로 반(反) 투치족 선전을 시작하였다. 쥐베날 하브자리마나 치하의 정부는 후투족을 투치족으로 다시 예속시키려는 르완다 애국전선(RPF)에 대해 항전했다.
1993년8월, 정부와 RPF는 탄자니아의 아루샤에서 아루샤 협정이라는 정전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유엔은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였다.
1994년4월 6일,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탑승했던 비행기가 격추당하고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이는 투치족의 반항이라는 설도 있다)
4년간의 내전으로 인해 인테라하므웨의 후투족 군인들은 투치족과 RPF 중 50만 명을 사살하였고, 후투족은 투치족을 100만 명 정도 사살했다. 그래서, 민간인들은 부룬디 등 인접 국가에 피난을 하기도 했다. 르완다 내전당시 후투족의 투치족 학살만행은 2006년 르완다의 호텔 지배인이 피난민들을 살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호텔 르완다》에서 고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