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는 1919년2월에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이다. 3·1 운동 당시 발표된 독립선언서와 구별하기 위해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 라고도 한다. 조소앙(趙素昻)이 작성하였고[1] 당시 해외에서 활동중이던 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하였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선포한며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개요
1919년 2월 (또는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선언서의 작성과 서명이 사전에 이루어졌음을 고려하여, 별칭으로 '무오독립선언'[2] 또는 '길림선언'으로 불리기도 한다.
무오독립선언 직후 조소앙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인 백관수, 이광수 등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이 선언서 작성 이후 예관 신규식은 동제사 요원들로서, 곽경,선우혁 등을 국내의 손병희, 이승훈 등에게 밀파하여 3월1일 독립혁명의 거사에 참여하도록 밀서 등을 통하여 동참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당시 한성(=서울)에서 손병희 등 종교인 대표 33인의 기미독립선언과 함께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그 이전에 동경에서 2.8 학생 독립선언을 한 600여명의 학생들 중에서 약390여 명이 일시에 귀국하여 각자의 고향에서 3.12독립혁명을 일으켰다. 또한 예관 신규식의 지도를 받은 몽양 여운형을 당수로 하는 동제사 요원 중에서 젊은 청년들 위주로 신한청년당을 1918년 조직하여 이들 조직의 주도로 3.1혁명이 일어났다.
무오독립선언서
조소앙(본명 조용은)이 기초한 선언서에는 사기와 강박으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병합(한일병합조약)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黎民: 백성)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중략)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다음백과] 독립운동가 조소앙(趙素昻)....1918년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여준(呂準)·김좌진·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 등과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해 김교헌(金敎獻) 등 재만독립운동가 39명과 공동서명하여 발표했다.
↑김규식(金奎植)은 북로의 김규식(1882~1931)과 임정의 김규식(1881~1950)이 있는데,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는 북로 김규식으로 본다. 북로 김규식은 무오독립선언에 연서한 김좌진과 함께 하며 만주에 있었던 데 반해, 임정 김규식은 1918년 12월에 상해에 있었고, 12월 말에는 난징에서 김순애와 재혼한 뒤 상해로 돌아와 있었으며, 보름 뒤 1919년 1월에는 상해를 떠나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어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정황 상 무오독립선언 연서자 김규식(金奎植)은 북로의 김규식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