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곤(金希坤, 본명: 김봉곤, 본명 한자: 金琫坤, 1915년 4월 12일~1943년 8월 30일)은 일제강점기의 인민 공산화 사회주의 관련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29세 때에 폐렴으로 인해 병사한 사후, 62주기를 15일 앞두고 있었던, 2005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1915년 4월 12일, 김봉곤(金琫坤)이라는 이름으로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광양군 광양면 도월리 119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1921년(일곱살때)에 김희곤(金希坤)으로 개명(改名)되었다.
1928년 3월, 전남광양공립보통학교(全南光陽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한 후 이듬해 1929년 3월에는 전남 광주사범학교 1학년을 모두 수료함과 함께 자퇴(중퇴)를 하고 나서, 한2년째 농업에 종사하던 그는 1931년 11월 형 김갑곤(金甲坤)의 소개로 사회주의 도서인 『프롤레타리아 경제학』 및 기타 서적을 학습하면서, 서서히도 사회주의 운동 등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김희곤 등은 동년(1931년)의 12월 전남 광양군(光陽郡)의 광양면(光陽面)의 도월리(道月里)에서 총재 박경래(朴坰來)의 지도로 〔전남적색농민조합(全南赤色農民組合)〕을 결성하고 조직적인 항일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동 농민 조합은 새로운 단계의 농민 운동 등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 결사 단체로써,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사회주의 학습을 통해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자각하고, 동시에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길러 나가기 시작했다.
1933년 5월 1일, 전라남도 광양군 광양면 용인리(龍仁里)에서 〔전남적색농민조합(全南赤色農民組合)〕의 비상대책위원장 겸 최고위원 김기문(金基文)을 비롯한 농민 조합 동료 등과 함께, 농민 조합 총재 박경래(朴坰來)가 작사한 《인민 공산화 사회주의 혁명가(人民 共産化 社會主義 革命歌)》라는 노래 등을 고창하면서, 농민 행진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일로 인해 수배령이 내려지면서, 도피하였다가, 동년(1933년)의 10월 19일경에 전남 구례에서 체포되어, 1934년 1월 11일, 충남 공주지법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6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바로 항소하면서, 결국 1935년 7월 19일, 징역 3년 6개월형을 최종적으로 선고받았고, 충남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후 1936년 11월 1일, 만기출감하여 고향으로 귀거하였다.
그 이후 폐렴으로 와병하다가 1943년 8월 30일, 향년 2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2005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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