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아사히코 친왕은 분세이 7년 (1824년)에 태어났다. 초명은 나리노리 (成憲)이다. 나라이치죠인의 문주가 되었고, 친왕 선하 후 출가하여, 교토쇼렌인의 몬제키가 되었으며, 천태좌주를 겸하여 손오 입도친왕이라 칭하였다. 분큐 3년 (1863년), 환속하여 나카가와노미야의 궁호를 받아, 이름을 아사히코라고 고친다. 겐지 원년 (1864년), 궁호를 카야노미야로 고친다. 국사어용봉으로 고메이 천황을 보좌하여, 천황이 혐오했던 존왕양이파를 조정에서 추방하는 데 힘썼다. 이 때문에, 메이지 유신 후에는, 반정부 음모 혐의로 체포되, 친왕 신분을 박탈당하고, 아키히로시마번에 맡겨졌다. 메이지 3년 (1870년)에 후시미노미야에 복귀했다.
1875년 (메이지 8년)에 쿠니노미야의 궁호를 받았다. 궁호의 유래는 쿠니쿄에서 따왔다고 한다 (후시미노미야의 당주가 1대 간격으로 "邦"를 편휘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 후, 아사히코 친왕은 신궁제주로서 고의 부흥에 임해, 1891년 (메이지 24년)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대 쿠니요시 왕은 1873년 (메이지 6년)에 태어났다. 1891년 (메이지 24년)에 아버지 사망에 의해서, 궁가를 상속받았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대장까지 오른다. 1899년 (메이지 32년), 공작 시마즈 타다요시의 딸 치카코와 결혼했다. 1928년 (쇼와 3년), 대만 체류 중에 조선인 독립운동가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을 당했지만 부상은 없었다. 1929년 (쇼와 4년), 궤양성 복막염에 의해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쿠니요시 왕의 동생인 타카 왕은, 교토에 거주하면서 독립된 궁가를 일으키지도, 신적강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혼인한 후 일가를 가지고 있어, 쿠니노미야 본가와는 독립된 생활을 했다. 이는 당초 니시쿠니노미야를 자칭할 예정이었다는 설이 있다. 왕비 시즈코와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고 신궁제주를 지냈다. 1937년 (쇼와 12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