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츠라노미야 (桂宮)는 4세습친왕가의 하나이며, 카츠라노미야 궁가의 궁호이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창설되어 메이지 시대에 가계가 단절되었다. 주요 영지는 헤이안쿄 근처의 카츠라 주변에 있었다. 고쿠다카가 3천여석이었는데, 이는 모든 공가들 중 가장 많은 고쿠다카였다. 하치죠노미야 → 토키와이노미야 → 쿄고쿠노미야로 궁호가 바뀌어갔다.
코카쿠 천황의 황자 타케히토 친왕이 계승하여 카츠라노미야(桂宮)로 개칭했다. 타케히토 친왕의 사망 후, 다시 당주가 공석이 되었다. 타케히토 친왕의 형인 닌코 천황의 황자 미사히토 친왕이 뒤를 이었지만 요절해, 다시 공석이 되었다. 1862년 (분큐 2년)에 누나인 스미코 내친왕이 계승했지만, 1881년 (메이지 14년)에 사망하였고, 이로 인해 카츠라노미야는 가계 단절 되었다.
1988년 (쇼와 63년), 미카사노미야 타카히토 친왕의 차남인 요시히토 친왕이 새로운 궁가를 창설하였고, 같은 이름의 카츠라노미야로 칭했다. 하지만, 이 요시히토 친왕의 인장에서 비롯된 것이며, 예전부터 있었던 카츠라노미야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또한, 요시히토 친왕은 아리스가와노미야의 제사를 이어받은 타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을 흠모하고 있었으며, 노부히토 친왕의 공무 등을 많이 계승하였기 때문에, 신카츠라노미야의 계통은 오히려 아리스가와노미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요시히토 친왕은 독신으로 궁가를 창설했고, 이후에도 혼인하는 일 없이 2014년 (헤이세이 26년) 6월 8일에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 카츠라노미야 궁가 역시 요시히토 친왕의 1주기를 거치고, 이틀 후의 권사의 의를 거쳐 공식적으로 가계 단절되었다.
그 외
메이지 시대의 총리대신을 지낸 정치인이자 군인인 카츠라 타로는 그 공적에 의해 1911년 (메이지 44년) 4월 21일, 공작의 작위를 받지만, 일본 공작을 영어로 번역하면 "prince"이기 때문에 우연히 영어 번역이 카츠라노미야 궁가의 당주와 같은 "prince Katsura"가 되었다. 다만 영어 번역에 경우, 왕족은 다른 화족과 차이를 두기 위해 경칭으로 "H.I.H (His Imperial Highness)"를 붙혀 구별한다.
본저택과 별저
본저택은 교토 교엔 안 (도시샤여자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와 교토 고쇼 사이)에 있다. 카츠라노미야 저택에는 부지를 둘러싼 축지담과 오오테몬과 호화로운 칙사문의 두개가 남아있다. 또한 원래 있던 건물은 니조성 혼마루에 이축되어 보존되고 있다.
현재, 내부는 궁내청 직원의 숙소 부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내부에는 임시로 복수의 단층 공연 주택이 세워져 있다.) 내부는 비공개이다.
카츠라 이궁을 지은 초대 토시히토 친왕이 조영한 정원 및 연못이 온전히 남아있어 건물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귀중한 문화재이다. 그러나 그 정원도 최근 궁내청 직원을 위한 공영주택 신설을 위해 헐릴 위기에 처해있었다. 최근, 칸인노미야 저택이 복원 정비되 일반에 공개되었고, 화제가 되면서 카츠라노미야 저택도 숙소를 옮긴 뒤 복원 장비해서 일반에 공개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매우 높다.
별저・별업으로써는 저명한 카츠라 이궁 외에, 카이덴오차야(開田御茶屋), 고료오차야(御陵御茶屋), 타카미네 저택(鷹峯御屋敷), 오야마 저택(小山御屋敷)이 있다. 많은 연구가 보이는 카츠라 이궁에 대해서, 그 외의 별저・별전에 대해서는 니시 카즈오・오자와 아사에에 의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보리사
카츠라노미야 및 분가인 히로하타가의 보리사는 쇼코쿠지 탑두의 지쇼인(慈照院)이다. 지쇼인에는 카츠라노미야 궁가와 히로하타 가문의 건물이 많이 남아있고, 객전은 카츠라노미야 저택에서 옮겨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