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마르코는 로마인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프리스쿠스라고 한다. 일부 출처에 의하면, 책자 형태로 묶은 형태로 된 것으로 알려진 초창기 《주교 사망록》(Depositio episcoporum)과 《순교자 목록》(Depositio martyrum)은 바로 마르코가 교황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작성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1]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교황 마르코는 앞으로 새로 선출된 교황은 착좌식 때 오스티아의 주교로부터 직접 팔리움을 수여받음과 함께 축성받아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세 명의 주교가 로마의 주교를 축성해야 하는데, 그 가운데 첫째가 오스티아의 주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팔리움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5세기 중엽부터였다. 교황 마르코는 또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기증받은 영지 위에 산 마르코 성당을 세우고 발비나카타콤바 위에는 기념 성당을 세웠다.[1]
마르코는 자연사하였으며, 시신은 발비나 카타콤바에 매장되었다. 그러다가 1048년 그의 유해는 발레트리 시로 이장되었으며, 1145년에 다시 로마의 산 마르코 성당으로 이장되어 성당 제대 밑 유골함에 안치되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