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바수스 (Gaius Julius Quadratus Bassus, 70년 – 117년)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이다. 그는 로마 최고 공직들을 역임했던 속주의 귀족 출신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단장 및 유대, 카파도키아, 갈라티아, 시리아, 다키아 등의 속주 등의 직위를 수행했다. 그는 트라야누스 시기의 다키아 및 파르티아 원정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수스는 서기 105년 5월부터 8월까지 눈디니움 기간 그나이우스 아프리아누스 덱스테르를 공동재임자로 두었던 보좌집접관이었다.[1]
바수스의 경력은 대략 87년에서 89년에 게미나 제13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시작했다. 이 이후에 비긴티비리를 구성하는 행정관 중 하나이자, 로마 원로원에 들어가는 예비적 및 요구되는 기본적 디딤 단계인 모네탈리스가 되었다.[5] 이는 흔치 않은 경우였는데 보통 비긴티비리 신분은 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수행하기 이전에 맡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Dabrowa는 이 역순서가 원로원에 진출할 의도가 있던 기사 계급 출신자들에겐 흔한 경우라 언급했다. 어찌됐든 바수스는 트레스비리 모네탈리스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이 행정관 직위는 파트리키 계급들이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자들에게만 할당되는 자리였다.[6] Dabrowa는 바수스가 이 모두가 탐내는 보직을 삼선 집정관이자 '높은 정치적 사회적 인물'이었던 그의 친척 가이우스 안티우스 아울루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의 개입을 통해 얻었을 것이라 주장한다.[7]
비긴티비리를 마친 후, 바수스는 92년쯤에 크레타 키레나이카 속주를 담당하는, 공공 재원을 관리하는 재무관을 맡았다. 이 지위로 그는 원로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식적인 인증을 얻었다. 그는 그 다음에 전통적인 로마의 행정관직인 조영관을 수행했고, 이후 98년경에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다. 이 마지막 행정관직은 바수스가 속주를 관리하거나 혹은 군단장인 레가투스 레기오니스로 복무할 자격을 주었다. 바수스는 군 경력을 택했다.[5]
그는 99년부터 101년까지 생애 첫 군단장 직위인 클라우디아 제11군단의 레가투스를 맡았다. 그 후에는 101년과 102년 동안에 다키아 전쟁을 위해 스키티카 제4군단과 풀미나타 제12군단 등을 포함한 여러 군단에서 차출한 벡실라티온의 지휘권자를 수행했다. 바수스는 102/103년부터 104/105년까지 유대 총독직이 겸해졌던, 프레텐시스 제10군단의 지휘관을 수행했다. 105년 여름 기간에 그는 집정관으로 넉 달을 보냈다. 집정관이 되는 것은 로마 사회의 가장 높은 영예라고 여겨졌고 로마 황제는 집정관 후보들을 택하는 데 신중을 기울였을 것이다. 집정관 수행 이후, 바수스는 로마 국교의 최고 지위 성직자들인 국가 사제단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기사 계급 출신자로서 대단한 사회적 업적이었다.[5] 이후에 114년과 115년 각각 카파도키아, 갈라티아 총독직을 수행했고, 그 이후엔 시리아 총독도 맡았다.[3] 이 기긴에 그는 갈리카 제3군단 및 게미나 제13군단 등 파르티아 전쟁에 참전했던 다수의 군단들에서 차출된 병사들로 된 벡실라티오의 지휘관였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