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나 마사유키

호시나 마사유키
保科 正之
호시나 마사유키상 (가노 단유히쓰, 도쓰가 미사조) (후쿠시마 현립 박물관 기탁)
호시나 마사유키상
(가노 단유히쓰, 도쓰가 미사조)
(후쿠시마 현립 박물관 기탁)
가쿠요
가쿠요
신상정보
시대 에도 시대 전기
출생 게이초 16년 음력 5월 7일(1611년 6월 17일)
사망 간분 12년 음력 12월 18일(1673년 2월 4일)
개명 고마쓰(幸松) → 마사유키(正之)
시나노 다카토번
데와 야마가타번
무쓰 아이즈번
관위 정4위하 히고노카미(肥後守) 겸
사코노에주조(左近衛中将)
씨족 호시나씨
부모 아버지: 도쿠가와 히데타다
어머니: 쇼코인
양부: 호시나 마사미쓰
양모: 겐쇼인
배우자 정실: 기쿠히메(나이토 마사나가의 딸)
계실: 오만노가타

호시나 마사유키(일본어: 保科 正之 ほしな まさゆき[*], 게이초 16년 음력 5월 7일(1611년 6월 17일) ~ 간분 12년 음력 12월 18일(1673년 2월 4일))는 일본 에도 시대 전기의 다이묘이다. 아이즈 마쓰다이라가(호시나 마쓰다이라가)의 시조이다. 시나노 다카토번 제2대 번주, 데와 야마가타번주, 무쓰 아이즈번 초대 번주를 지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서손이자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이복 동생이다. 형 이에미쓰의 사후 조카 이에쓰나를 보좌했다.

생애

유년 시대

게이초 16년(1611년) 음력 5월 7일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모는 호조씨의 가신이었던 사카에가의 딸 시즈(후의 쇼코인)으로 히데타다 유모의 시녀였다. 공처가였던 히데타다는 정실부인 오에요노가타의 눈을 피해 다케다 신겐의 차녀 겐쇼인에게 임신한 시즈를 맡겼다. 이는 로주 도이 도시카쓰 등 히데타다의 측근 몇 명만 아는 사실이었다.

겐나 3년(1617년) 다케다씨와 친분이 있는 시나노 다카토번호시나 마사미쓰의 양자가 되었다. 마사미쓰의 친동생 호시나 마사사다[1] 대신 후계자가 되었고, 1631년 3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아이즈번주

호시나 마사유키의 묘(2002년 4월 촬영)

스겐인이 죽고 난 뒤인 1629년 18세의 마사유키는 친아버지와 만나게 된다. 제3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근면 성실함과 유능함을 겸비한 이복동생을 예외적으로 총애하여 1636년 데와 야마가타번 20만 석을 배정하였다. 1643년 무쓰 아이즈번 23만 석의 다이묘로 임명되면서 호시나 마사사다다이묘가 되도록 요청하여 호시나 가문을 지키게 하였다. 마쓰다이라씨를 사용하라는 막부측의 권유도 있었지만, 호시나 가문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거절하였다. 제3대 번주 마사타카 대에 와서야 마쓰다이라씨를 사용하고 신판 다이묘의 반열에 들었다.

1651년 이에미쓰는 임종시 마사유키에게 「도쿠가와 종가를 부탁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감명받은 마사유키는 1668년 「아이즈 가훈 15조목」을 정했다. 제1조에 「아이즈번 사람은 막부를 수호해야 할 존재이며, 다이묘가 이를 배반해도 가신은 따라서 안 된다」고 적어 이후의 다이묘사무라이들은 모두 이를 충실히 지켰다. 막말의 다이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이 유훈을 지키기 위해 막부수호의 중심인물이 되어 끝까지 유신 세력과 싸웠다.

만년

1669년 은거에 들어가 1673년 12월 18일 에도에서 향년 63세(만 61세)로 사망했다.

자녀

각주

  1. 마사사다는 후에 이노번주가 된다
전임
(도쿠가와 히데타다)
(호시나 마사미쓰)
호시나가 당주
1631년 ~ 1669년
후임
호시나 마사쓰네
전임
호시나 마사미쓰
제2대 다카토번 번주 (호시나가)
1631년 ~ 1636년
후임
도리이 다다하루
전임
도리이 다다쓰네
야마가타번 번주 (호시나가)
1636년 ~ 1643년
후임
마쓰다이라 나오모토
전임
가토 아키나리
제1대 아이즈번 번주 (호시나 마쓰다이라가)
1643년 ~ 1669년
후임
호시나 마사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