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년 이전에 헤르베르트 2세는 네우스트리아와 앙주백작으로 있던 로베르 1세(후일의 서프랑크 왕)의 딸 아델라와 결혼하였다. 아델라는 지참금으로 뫼우(Meaux) 변경백령을 가져왔다. 헤르베르트는 카스트룸 테오도리히 지역에 성곽을 수축하여, 요새를 형성하였다. 플로도하르 연대기에 의하면 이때부터 샤토 티에리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그는 아들 위그를 랭스 대주교로 앉히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대신 922년세울프가 랭스대주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922년에 랭스 대주교 세울프(Seulf)로부터 자신의 사후 헤르베르트의 아들 위그를 후계자로 승인할 것을 약속받았다.[3] 그러나 위그의 랭스 대주교 임명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925년랭스대주교가 죽자 헤르베르트는 위그를 랭스 대주교에 앉힌 뒤 926년교황 요한네스 10세에게 사자를 보냈고, 교황 요한네스 10세로부터 위그의 대주교직 승인을 받아냈다. 승인을 확인한 후 헤르베르트는 아들 위그를 오세르에 보내 신학공부를 하게 했고, 실제 권한은 수아송의 아보주교가 대신 행사하였다.
헤르베르트 2세는 위그 르 그랑과 함께 로베르 1세를 도와 단순왕 샤를 3세파 군대와 계속 교전, 923년 초 그의 군대가 레모아(Rémois)를 점령했고, 923년6월 15일 최종적으로 샤를 3세파 군대를 격파하고 샤를 3세를 사로잡았다. 헤르베르트 2세는 샤를 3세를 솜의 페로네 성의 감옥에 유폐하였다.[4] 일설에는 헤르베르트가 샤를 3세 단순왕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주겠다고 약속했다가 배신하여 그를 포로로 가두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헤르베르트는 샤를 3세 단순왕을 카스트룸 테오도리히(Castrum Theodorici, 훗날의 샤토 티에리) 감옥으로 옮겼다가 페로네의 감옥으로 샤를을 옮겼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923년6월 15일로베르 1세가 전사하고, 새 왕으로 그의 사위인 라울이 추대되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이 샤를 3세를 사로잡아서 데리고 있는 것을 근거로, 외조카사위이자 동서인 라울에게 이런 저런 이권을 요구하였다. 헤르베르트는 샤를을 라울과의 협상 수단으로 이용했다. 라울은 비록 죄수복을 입은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샤를 3세 생쁠을 만나자 그에게 칼을 바치며 군주로 예우하였다. 한편 군주를 납치하고 감금하면서 이런저런 이권을 요구하는 동서 헤르베르트에게 염증을 느낀 라울은 그를 의도적으로 멀리하였다.
샤를 3세를 사로잡은 뒤 교황 요한 10세는 그를 규탄, 샤를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교황 요한 10세는 당시 유럽의 지도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샤를 3세의 구금에 대해 항의하였다. 교황 요한 10세는 헤르베르트에게 샤를 3세를 즉시 풀어주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지만, 헤르베르트는 그의 경고를 무시했다.[5]
924년 헤르베르트는 사위인 플랑드르의 아르눌프 1세 및 아르눌프의 동생 아달울프(Adalolf)와 군대를 이끌고 북부 해안가에 들어오는 바이킹족과 교전하여 물리쳤다. 바로 노르망디를 공격, 노르망디 북동부의 에우(Eu)를 점령했다.
교황의 권위를 경멸한 헤르베르트는 925년 아들 위그를 랭스의 대주교로 착좌시켰다.[6] 이 때 헤르베르트는 교황 요한 10세에게 자신의 아들이 주교로 서임되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교구령을 분할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여러 세력에게 배분하겠다고 위협하였다.[6]
라울과의 갈등
라울은 국내 반대파들을 상대해야 하면서, 동시에 계속 영토를 침략하는 바이킹과 북방의 해적들, 마자르 족(헝가리인) 등의 침략과 약탈에 맞서 싸워야 했다. 헤르베르트는 자신이 샤를 3세 생쁠를 체포, 포로로 데리고 있는 것을 내세워 라울을 협박했지만 라울은 소극적으로 반응했다.
926년레온의 백작 로저 1세(Roger I de Laon[7])가 사망하자 헤르베르트는 라울왕에게 레온백작직을 자신의 아들 외드에게 줄 것을 요구했지만 라울은 거절, 반대했다.[8] 헤르베르트 2세는 감금된 샤를 3세를 위협하면서 라울에게 레온을 요구하였고, 레온 시내를 점령했지만 라울은 거절했다. 927년까지 레온 백작직을 놓고 그는 라울과 갈등하였다. 그는 감금당한 샤를 3세 생쁠을 위협하거나, 샤를 3세를 풀어주겠다며 라울에게 수시로 으름장을 놓았다.
926년아미앵을 점령 아미앵백작루돌프(Rudolf)를 축출하고, 아미앵백작이 되었다. 927년 생 캉탱에, 929년에는 페로네에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라울은 그를 경계하였다. 928년레온의 영주를 겸하였다. 같은 928년 아미앵에 성곽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931년 아미앵은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2세는 아미앵을 포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의 아들 위그가 잠시 아미앵백작직을 얻게 된다. 927년 헤르베르트는 라울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927년 헤르베르트는 자신이 샤를 3세 생쁠를 데리고 있는 것을 들어 라울에게 레온 지역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헤르베르트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의 힘을 빌어 라울 왕에게 다시 레온을 요구하여 929년에 확보한다.
927년 헤르베르트는 노르망디공작롤로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롤로는 들어주는 대신 헤르베르트의 아들 중 한 명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아들 외드를 롤로에게 인질로 보냈다.[9] 928년에는 아들 외드를 데리고 부르고뉴로 갔다. 프로방스의 위그는 아들 외드를 비엔나 자작에 임명한다.
928년 라울을 상대로 라온을 넘겨주지 않으면 샤를 3세를 풀어주겠다고 위협하였다.
헤르베르트는 라울의 반대파가 있다는 점과 자신이 샤를 생쁠을 데리고 있는 것을 이용, 라울을 위협했다. 그러나 929년 샤를 르 생쁠은 페로네의 감옥에서 굶어죽었고, 라울을 반대하는 세력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샤를 3세가 죽자 헤르베르트 혼자 라울에게 저항했고, 930년 초, 헤르베르트는 라울의 형제인 보소가 소유한 비트리 성을 점령했다. 샤를 생쁠의 사망 소식을 접한 라울은 형제인 보소와 네우스트리아후작위그 르 그랑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비트리엔페르투아(Vitry-en-Perthois)을 공격했다. 931년라울과 보소, 위그 르 그랑은 헤르베르트 2세의 아들 위그를 물리치고 랭스까지 진격하여 점령, 헤르베르트를 성공적으로 패배시키고 돌아갔다. 샤를의 죽음을 계기로 위그 르 그랑과의 갈등도 표면화되었다. 위그 르 그랑과의 갈등은 위그가 루이 4세와 갈등하는 937년에 가서 화해하게 된다. 라울은 랭스를 점령한 뒤 헤르베르트의 아들 위그를 쫓아내고, 아르토를 랭스 대주교로 임명했다. 931년 그는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와 교섭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한다.
생애 후반
헤르베르트는 자신의 아들들 중 위그를 랭스 대주교 자리에 앉히고 싶어하였다. 자녀 중 한 사람을 성직자로 만들어서 집안의 종교적 후광을 얻는 것은 고대 5,6세기 프랑크 왕국 때부터 이어진 관례의 하나였다. 그러나 헤르베르트의 아들 위그를 반대하던 랭스 대주교 아르토와 분쟁을 일으켰다. 랭스 대주교 아르토는 서프랑크 왕국의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플로도하르트(Flodohard)의 후견인이었다. 세울프가 랭스 대주교로 선출되었고, 세울프는 헤르베르트 2세를 달래기 위한 노력으로 자신의 후계자를 헤르베르트의 아들 중에서 선택하겠노라고 엄숙히 약속했다. 925년 세울프가 죽자 헤르베르트는 라울의 도움을 얻어 교황 요한네스 10세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자신의 아들을 랭스 대주교로 임명하도록 동의를 구했고, 926년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아르토는 위그를 랭스 대주교로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다.
933년과 934년 라울이 헤르베르트 2세의 세력을 꺾기 위해 랭스로 쳐들어가 헤르베르트 2세가 단순왕 샤를 르 생쁠을 감금했던 요새를 불태웠다. 935년 전후로 그는 라울 또는 루이 4세에 의해 수아송, 비트리, 라온, 샤토 티에리 등을 압수당해 영지를 잃게 되었다. 934년 그는 독일왕 하인리히 1세에게 개입을 요청하였고, 하인리히 1세는 헤르베르트가 라울 왕에게 복종하는 대신, 랭스와 라온을 제외한 헤르베르트의 영토를 헤르베르트에게 돌려받게 했다. 이때 헤르베르트 2세는 라울에게 형식적으로 항복하였다. 라울은 얼마되지 않아 다시 헤르베르트를 공격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샤토 티에리 성을 점령했지만, 936년1월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었다. 라울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헤르베르투스 2세는 빼앗긴 샤토 티에리 요새를 되찾았다.
939년부터 940년 헤르베르트와 프랑크공작위그 르 그랑은 루이 4세에게 도전, 시범적으로 랭스를 점령하고 루이 4세를 위협했다. 이때 헤르베르트는 플로도하르트를 체포해 투옥시키고, 아들 위그를 랭스대주교에 임명했다. 보다못한 교황 스테파노 8세가 개입하여 바티칸 특사들을 파리로 파견, 서프랑크의 귀족들에게 루이 4세를 국왕으로 인정할 것, 루이 4세에게 반기를 드는 이들은 교황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보고 누구든지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위그 르 그랑, 헤르베르트 2세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일단 위축되거나 슬슬 지지를 철회했다. 교황 스테파노 8세의 특사들의 칙령에 복종하는 척 했지만, 위그, 헤르베르트 2세를 지지하던 프랑크인사제들은 일시에 지지를 모두 철회하였다.
교황 스테파노 8세는 헤르베르트에게 아들인 베르망두아의 위그에게 랭스의 대주교 자리를 제안하고, 루이 4세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교황 스테파노 8세는 바티칸 특사를 다시 보낼때 서프랑크 지역을 관할하는 대주교의 상징과 팔리움을 딸려서 파리로 보내 서프랑크 귀족들에게 루이 4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약속받았다.
943년루이 4세의 대관식을 치른 뒤, 얼마 뒤 헤르베르트는 체포되어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943년2월 23일아시네의 생캉탱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10] 10세기경 프랑스의 가톨릭 성직자이자 역사가 라올 글레버(Raoul Glaber)에 의하면 루이 4세가 헤르베르트의 교수형을 직접 지시, 보고받았다 한다.
사후
시신은 아시네생캉탱의 크루아 성당(Collégiale de Saint-Quentin) 크립트에 안치되었다. 그의 영지는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영지 분할을 놓고 3년간 갈등하였으나 위그 르 그랑의 중재로 분할이 확정되었다. 외드는 아미앵과 비엔나를, 위그는 랭스대주교직과 주변 지역을, 헤르베르트 3세는 오모이를, 로베르 1세는 뫼욱스와 트루아를 상속했다. 그러나 로베르가 죽으면서 헤르베르트 3세가 로베르의 영지를 차지했다가, 나중에 로베르의 아들 헤르베르트 4세가 그의 영토를 모두 상속했다. 헤르베르트 4세의 유일한 아들인 에티엔 또는 스티븐은 1019년~1020년에 아들을 잃고 1023년에 죽었으므로 헤르베르트 2세의 남자 후손들은 이때 단절되었다.
그러나 다른 아들인 아달베르트 1세의 아들 치니백작치니의 오토 1세의 후손들은 13세기까지 이어졌다. 헤르베르트 2세가 생전 차지하려고 노력했던 라온은 로저 2세가 938년 복귀했지만 로저 2세 사후 서프랑크 국왕과 후대의 프랑스의 군주의 직할령으로 편입된다. 이때 그의 딸들 중 한 명이며, 노르망디공작윌리엄 1세 롱스워드의 과부였던 딸 리우트가르트는 메제레(Mézerais)를 가져갔다. 그의 아들들간 유산을 분배할 때 개입한 위그 르 그랑은, 블루아는 자신의 측근 테오도발트에게 주었다. 테오도발트는 리우트가르트의 재혼 상대가 되는 남성이다.
헤르베르투스 2세가 살아있을 당시의 직위는 counts나 comte가 아닌 comtis였다. 그가 차지했던 영지들은 헤르베르툼 콤티엠(Heribertum comitem)이라 불렸다.
각주
↑샤를마뉴-경건왕 루트비히 1세-대머리 카를 2세 르 쇼브-말더듬이왕 루이 2세-샤를 3세 생쁠 샤를마뉴-피피노 카를로만-베른하르트(서자)-상리스 백작 피핀 2세(서자)-헤르베르트 1세-헤르베르트 2세
↑Detlev Schwennicke, Europäische Stammtafeln: Stammtafeln zur Geschichte der Europäischen Staaten, Neue Folge, Band III Teilband 1 (Marburg, Germany: J. A. Stargardt, 1984), Tafel 49
↑Eleanor Shipley Duckett, Death and life in the tenth century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67.), str. 155
↑Jean Dunbabin, "West Francia: The Kingdom",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III: c. 900–c. 1024, ed. Timothy Reut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378–79.
↑ 가나Mann, Horace K., The Lives of the Popes in the Early Middle Ages, Vol. IV: The Popes in the Days of Feudal Anarchy, 891-999 (1910), pg. 176
↑그의 친척으로 추정되며, 일설에는 카롤링거 왕조가 아닌 휴고니드 왕조 출신이란 설이 있다.
↑The Annals of Flodoard of Reims, 916–966, eds & trans. Steven Fanning: Bernard S. Bachrach (New York; Ontario, Can: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11), pp. 15–16
↑Annals of Flodoard of Reims, quoted in Houts (2000), p. 45.
↑Louis-Paul Colliette, "Mémoires pour servir à l'histoire ecclésiastique, civile et militaire de la province du Vermandois", Berthoud, 1771, P.457
↑아버지 레니에 1세는 로타르 1세의 외손자이고, 레니에의 부인은 대머리왕 카를 2세의 딸임
Settipani, C.: Nos ancêtres de l'Antiquité. Études des possibilités de liens généalogiques entre les familles de l'Antiquité et celles du haut Moyen-Age européen. Paris,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