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 비만 때문에 궁정에서 "큰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클로틸드는 마르상 백작부인이 어린 여동생, 마담 엘리자베트(1764년 출생)와 함께 길렀다. 마담 제오프랭의 딸, 마리테레즈 드 라 페르테앵보는 그녀의 철학 가정교사였다. 마담 페르테앵보는 마르상 백작부인에게 두 공주들이 연극할 소극 텍스트를 제공해주기도 한다.[3] 클로틸드 드 프랑스는 6살에 아버지를 잃고 8살에는 어머니를 잃었다.
1770년은 첫째 오빠 도팽과 오스트리아 여공작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으로 유명한 해였다. 1771년과 1773년, 다른 두 오빠들이 사부아 공주들과 결혼했다. 할아버지 루이 15세는 1774년 사망하였고, 첫째 오빠는 루이 16세라는 이름으로 왕이 되었다.
1789년 7월 가족들과 함께 망명온 오빠 아르투아 백작과 1791년 망명온 고모들, 루이 15세의 딸들(Mesdames)과 재회한 기쁨을 누렸지만은, 클로틸드는 1793년 교수형을 당한 오빠 루이 16세와 올케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 1794년 교수형을 당한 자매 마담 엘리자베트의 죽음, 1795년탕플 감옥에서 10살의 나이로 사망한 조카 루이의 죽음을 듣게 되어 상심했다.
클로틸드의 시아버지는 파리 조약의 패배를 받아들인지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고, 그녀의 남편이 사르데냐 왕 카를로 엠마누엘레 4세로서 즉위하였다. 새 군주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등의 유화책에 나섰으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베르 장군은 1798년 왕국을 침공했다. 토리노 궁정은 사르데냐로 망명갔다 (1814년까지).
클로틸드의 시성은 이르면 1804년부터 로마에서 진행되었으며 가톨릭 교회는 이와 관련한 이유를 소개하며 성덕 인정의 첫 단계로써1808년 그녀를 "하느님의 종Servante de Dieu"으로 선언하였다. 1982년에는 그녀의 미덕이 지닌 용맹성을 인정한 교회령이 간행되어, "가경자Vénérable"라는 공식 칭호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