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야누스의 기념비는 아우구스투스 영묘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서기 107/108년경에 마르스 울토르에게 헌액되었다. 기념비에는 적군과 맞서 싸우는 군단병들을 묘사한 메토프 54개가 있으며, 이 메토프들 중 대부분은 근방 박물관에서 보관되고 있다. 이 기념비는 로마가 새롭게 정복한 지역 밖에 있는 부족들에 경고로 여겨졌을 것이다.[1]
20세기 무렵, 트로파에움 트라이아니는 돌무더기와 모르타르로 된 더미가 돼버렸고, 기념비의 부조들도 그 주위로 흩어져 있었다. 현재 모습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근방 박물관들에서 원래의 기념비의 조각들을 포함한 고고학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본래의 54개 메토프들 중에, 48개는 루마니아의 박물관에 있고 하나는 이스탄불에 있다.
트로파이온
트로파에움 트라이아니는 커다란 금석문과 함께 마르스 울토르(복수자 마르스)에게 헌정되었다. 금석문은 육각형으로 된 트로파이온 중 두 면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남아 있는 부분들을 토대로 복원한 것은 다음과 같다:
MARTI ULTOR[I]
IM[P(erator)CAES]AR DIVI
NERVA[E] F(ILIUS) N[E]RVA
TRA]IANUS [AUG(USTUS) GERM(ANICUS)]
DAC]I[CU]S PONT(IFEX) MAX(IMUS)
TRIB(UNICIA) POTEST(ATE) XIII
IMP(ERATOR) VI CO(N)S(UL) V P(ater) P(atriae)
?VICTO EXERC]ITU D[ACORUM]
?---- ET SARMATA]RUM
메토프 54개로 이뤄진 프리즈가 기념물에 있었다. 이 중에 48개는 근방의 아담클리시 박물관에 있고, 하나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소실되었다(소실된 것들 중 두 개는 부쿠레슈티로 수송 중에 도나우강에 빠트렸다는 지우레스쿠의 언급이 있다).[3]
Metope II
Metope VI: 말 발굽 아래의 적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한 트라야누스 기마살 (Gramatopol)
Metope IV 트로파에움에 나타난 데케발루스의 자결 - Mihai Gramatopol에 의하면 이 메토프는 E. Mironescu가 잘못 복원했다고 한다
XXIV: 절벽 밑으로 던져지는 다키아인들의 시신 (Gramatopol)
병사의 방패의 쇠붙이 오른쪽에 있는 타불아 안사타, metope XXIV from Tropaeum Traiani
Adamclisi, imperial metope X: 두 부관 사이에 있는 트라야누스 (M. Gramatopol의 해설)
Metope XVII: 넓은 목보호대, 이마 보호대, 뺨 보호대를 갖춘 투구를 쓴 로마 병사. 또한 단 밑으로 이중으로 된 프테루게스가 달린 반소매의 어린갑과 오른팔에 합판(어린갑)으로 둘러싼 마니카를 착용하고 있다. 가장자리가 솟아 있고, 모서리에 감마 문양이 있으며 가운데에 쇠공이 달린 굽이진 직사각형 방패를 들고 있다. 턱수염이 난 앞쪽의 적군은 프리기아 모자와 헐렁한 의복을 입고 있으며, 양손으로 잡는 팔스를 휘두른다
Metope XX: 마니카 라미나타와, 프테루게스가 달린 어린갑를 착용하고 검으로 무장한 군단병, 그리고 팔스를 든 다키아 병사. 바닥에 부상을 당한 채 누워있는, 수에비 매듭을 한 게르만족 (바스트라나이족?) 전사
1837년에, 도브루자의 전략적 지점을 탐사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서 고용된 프로이센 장교 네 명이 최초의 발굴을 진행했다. 이 고문단은 하인리히 물바흐(Heinrich Muhlbach),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피셔(Friedrich Leopold Fischer), 카롤 빙케올벤도르프(Carol Wincke-Olbendorf), 헬무트 폰 몰트케로 이뤄졌다. 이들은 터널을 파 기념비 가운데에 도달하려 했고, 가운데에 도착했지만 발견된 것은 없었다.[4]
본 대학교의 C. W. Wutzer가 이 기념비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는 이 기념비에 관한 짧은 묘사 및 지역 전설들을 기록했다.[4]
트로파에움 트라이아니는 1882–1895년 사이에 Grigore Tocilescu, O. Benford, G. Niemann이,[6] 1909년에는 George Murnu 등을 통해 연구되다가, Vasile Parvan가 1911년에 연구를 중단하기도 했으며, Paul Nicorescu는 1935–1945년 사이에 이 지역에 대한 연구를 다시 벌였고, Gheorghe Stefan와 Ioan Barnea는 1945년에 연구를 진행했다. 1968년부터 이 지역은 루마니아 아카데미 관할하에서 연구가 이뤄졌다.
Florea Bobu Florescu, Das Siegesdenkmal von Adamklissi. Tropaeum Traiani. Akademieverlag, Bukarest 1965.
Wilhelm Jänecke, Die ursprüngliche Gestalt des Tropaion von Adamklissi. Winter, Heidelberg 1919.
Adrian V. Rădulescu, Das Siegesdenkmal von Adamklissi. Konstanza 1972 und öfter.
Ian A. Richmond: Adamklissi, en Papers of the British School at Rome 35, 1967, p. 29–39.
Lino Rossi, A Synoptic Outlook of Adamklissi Metopes and Trajan’s Column Frieze. Factual and Fanciful Topics Revisited, en Athenaeum 85, 1997, p. 471–486.
Luca Bianchi, Il trofeo di Adamclsi nel quadro dell'arte di stato romana, in Rivista dell'Istituto Nazionale d Archeologia e Storia dell'Arte 61, 2011, p. 9-61 Ahttp://arche-o.nolblog.hu/pag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