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여공
鄭 厲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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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돌(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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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기원전 6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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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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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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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정나라 임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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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간 | 기원전 701년 ~ 기원전 697년, 기원전 680년 ~ 기원전 6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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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여공(鄭 厲公, ? ~ 기원전 673년, 재위 기원전 701년 ~ 기원전 697년, 기원전 680년 ~ 기원전 673년)은 중국 춘추 시대 정나라의 임금으로, 휘는 돌(突), 자는 자원(子元)이다. 정 장공과 옹길의 아들이며, 정 소공의 배다른 아우고, 정자 미, 정자 영의 형이다.
사적
정 장공 26년(기원전 718년), 위나라가 남연나라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에 쳐들어오자 형 태자 홀과 함께 제읍의 군대를 거느리고 적의 배후에 있다가, 6월에 남연 군을 북제에서 패배시켰다.[1]
정 장공 30년(기원전 714년), 북융이 정나라에 쳐들어오자, 아버지에게 매복병을 두고 적을 그곳으로 끌어들이도록 진언했고, 그대로 하니 정나라가 북융을 대패시켰다.[2]
기원전 701년, 아버지 정 장공이 죽자 적자인 형 홀이 뒤를 이었지만, 생전에 아버지가 사랑하는 부인이 많아[3] 그 위치는 불안했다. 공자 돌의 외할아버지 옹씨(雍氏)는 송나라의 대신이고 송 장공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다.[4][3][5] 송 장공은 홀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9월에[6] 채중을 사로잡았다.[4][3] 송 장공은 채중을 협박하여 공자 돌을 임금으로 세우고 송나라에 뇌물을 바치도록 강요했고, 공자 돌도 사로잡았다.[4][3] 채중은 협박에 굴하여 공자 돌과 함께 정나라로 돌아갔고, 세자 홀은 이 달 정해일[4] 혹은 신해일[3]에 위나라로 달아나니 공자 돌이 정 여공으로 기해일에 즉위했다.[4][3]
첫 재위
정 여공 원년(기원전 700년), 송나라가 정나라 여공을 옹립시켰다는 이유로 정나라에 많은 뇌물을 요구하여 정나라에서 감당할 수 없어 화평하지 못하였다.[7] 이에 두 나라를 화평하게 하고자 하고자 노 환공이 송 장공과 3차에 걸쳐 회맹했으나 실패했다.[8] 결국 정 여공은 11월 병술일에 노 환공과 동맹을 맺고 12월 정미일에 송나라와 교전했다.[8]
정 여공 2년(기원전 699년) 봄 2월, 다시 송나라와의 뇌물 문제 때문에 노 환공과 기후(紀侯)와 연합하여 기사일에 제나라, 송나라, 위나라, 연나라 군대와 싸워 대승했다.[9] 이후로 노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정 여공 3년(기원전 698년)에는 노 환공과 조나라에서 만나 3자동맹을 맺었다.[10] 그러나 송나라가 제나라, 채나라, 위나라, 진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보복전에 나서 정나라의 도성을 유린했다.[10]
정 여공 4년(기원전 697년), 채중이 전권을 휘두르자 이를 시기하여 채중의 사위 옹규(雍糾)에게 채중을 죽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옹규의 아내가 아버지에게 이를 알리는 바람에 거꾸로 채중에게 옹규가 살해당해 시체가 공개되었다.[11][3] 5월,[11] 정 여공은 옹규의 시체를 가지고 옹규를 꾸짖으며[3][11] 채나라로 달아났다.[11]
망명
가을 9월, 정 여공은 약(櫟) 땅을 지키는 대부 단백(檀伯)[12]을 약 사람의 도움으로 죽이고 거기에 눌러앉았다.[11][3] 노 환공이 송 장공, 위 혜공, 진 장공과 연합하여 정나라를 치고 여공을 복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11]
이듬해(기원전 696년), 전년에 정 여공을 복위시키려 한 제후들이 이번에는 채 환후까지 끌어들여 4월에 정나라를 치고 여공을 복위시키려 했으나 졌다.[13] 다만 송 장공이 약 땅에 있는 정 여공에게 병사를 지원해 주었으므로 정나라에서는 감히 정 여공을 치지 못했다.[3]
기원전 695년, 정 소공이 고거미에게 암살되었고,[14][3] 기원전 694년에는 정 소공의 뒤를 이은 정 자미가 제 양공에게 죽었으나, 채중이 정 여공을 끝내 배제하여 정 여공은 복위하지 못하고, 정 자영이 뒤를 이었다.[15][3]
복위
기원전 680년, 정 여공은 본국을 쳐 대릉에서 수장 부하를 사로잡았다.[16]《사기》에서는 유인하여 겁박했다고 한다.[3] 부하는 정 여공의 복위를 도와준다고 약속하여 석방되었고, 6월 갑자일에 정 자영과 그 두 아들을 죽이고 약속대로 정 여공을 복위시켰다.[16][3] 복위한 후, 여공은 부하가 두 마음을 품었하고 해 주살하고, 원번(原繁)에게는 자신이 망명하던 중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꾸짖으니 원번은 자결했다.[16]
기원전 679년, 송나라가 제후들과 함께 예(郳)나라를 치는 틈을 타 송나라를 침공했다.[17] 이듬해(기원전 678년), 송나라가 제나라, 위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보복 공격했다.[18] 게다가 자신이 복위했다는 것을 뒤늦게 초나라에 알리는 무례를 저질러, 가을에 초나라의 공격을 받았다.[18] 9월에, 채중의 무리로 옹규를 죽이는 데 가담한 사람들을 처벌해 공자 알을 죽이고 강서의 발을 잘랐다.[18] 이때 종질 공부 정숙이 위나라로 달아나자 3년 뒤에 복귀시켰다.[18] 겨울에는 제 환공, 송 장공, 노 장공, 진 선공, 위 혜공, 채 애후, 허남, 활백, 등자와 동맹을 맺었다.[18]
기원전 677년, 제나라에 첨(詹)을 사자로 보냈는데 사로잡혔다.[19] 이는 제나라가 패자가 되었음에도 조현하지 않은 까닭이다.[19]
기원전 676년, 괵공, 진후와 함께 주나라의 혼인 문제를 해결했다.[20][21]
기원전 675년, 왕자 퇴가 주 혜왕에게 불만을 품은 대부 위국, 변백, 자금, 축궤, 첨보와 요리사 석속의 추대를 받고,[22] 또 위 혜공과 남연 중보의 도움을 얻어 주 혜왕을 쳐 쫓아내고 주나라 왕이 되었다.[22][3] 기원전 674년, 정 여공은 주 혜왕과 왕자 퇴를 화해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23] 정 여공은 주나라를 쳐 남연 중보를 사로잡고[23] 혜왕을 모셔와 약에 살게 했다.[23][3] 겨울에 괵숙을 만나 함께 혜왕을 복위시키기로 약속했다.[23]
기원전 673년, 괵숙과 함께 왕성을 공격하여 왕자 퇴와 다섯 대부[24]를 죽이고 혜왕을 복위시켰다.[24][3] 혜왕은 정 여공에게 호뢰 이동의 땅을 주고, 왕후의 반감을 주었다.[24] 그러나 괵숙이 받은 상급보다 적다고 여긴 정 여공은 왕을 원망했다.[24] 여름 5월[24], 혹은 가을[3]에 죽었다.
각주
- ↑ 《춘추좌씨전》 은공 5년
- ↑ 《춘추좌씨전》 은공 9년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사기》 권42 정세가
- ↑ 가 나 다 라 마 《춘추좌씨전》 환공 11년
- ↑ 《사기》 복건의 주석에 따르면, 정경이었다.
- ↑ 《춘추》 환공 11년
- ↑ 《춘추좌씨전》 〈환공〉 12년에 나온다.
- ↑ 가 나 《춘추좌씨전》 환공 12년
- ↑ 《춘추좌씨전》 환공 13년
- ↑ 가 나 《춘추좌씨전》 환공 14년
- ↑ 가 나 다 라 마 바 《춘추좌씨전》 환공 15년
- ↑ 《사기》에는 선백(單伯)으로 나오나, 색은은 이를 오류라고 주석했다.
- ↑ 《춘추좌씨전》 환공 16년
- ↑ 《춘추좌씨전》 환공 17년
- ↑ 《춘추좌씨전》 환공 18년
- ↑ 가 나 다 《춘추좌씨전》 장공 14년
- ↑ 《춘추좌씨전》 장공 15년
- ↑ 가 나 다 라 마 《춘추좌씨전》 장공 16년
- ↑ 가 나 《춘추좌씨전》 장공 17년
- ↑ 《춘추좌씨전》 장공 18년
- ↑ 《춘추좌씨전》의 두예의 주석에 따르면, 작년에 첨이 제나라에 사로잡혔으므로 주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가 이 일을 했다.
- ↑ 가 나 《춘추좌씨전》 장공 19년
- ↑ 가 나 다 라 《춘추좌씨전》 장공 20년
- ↑ 가 나 다 라 마 《춘추좌씨전》 장공 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