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1년(선조 24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여 영산 현감(靈山縣監)을 지내며 임진왜란 때 곽재우의 휘하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정유재란 때 울산성 전투에서 권율에게 처형되었다.
생애
경상도 초계군 도방리(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 출신. 백제의 개국공신인 전섭(全攝)의 후손이고, 완산군(完山君, 시호는 충정(忠貞)) 전집(全潗)의 10대손이며, 완산 전씨 초계(草溪) 입향조인 수찬 전하민(全夏民)의 6대손이다.[1] 아버지는 전경원(全慶遠) 또는 전덕원(全德遠)이다.[2] 자는 시적(時適) 또는 시숙(時叔)이고, 호는 영수(英叟)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全悌라고 표기되어 있다. 당숙인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과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를 사사하였다.
교생(校生)으로 1591년 별시 무과에 을과 30위로 급제하였다.[3]1592년임진왜란이 발발, 그해 5월 당숙 전치원(全致遠)과 재종형 전우(全雨), 서재종제 전문(全雯) 등과 함께 초계에서 조호장(調護將)으로 거병, 6월부터 9월까지 낙동강변, 황강, 성주, 창녕, 현풍 등지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전공을 세웠다.[4]그 후 곽재우 휘하에 조전장(助戰將)으로 종군하였다. 1596년 3월에는 대구 팔공산에서 결사구국을 회맹하였다.
이후 1597년경에 경상도 영산현감으로 부임했다. 1597년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해 7월 21일 영산현감으로 경상좌도방어사 곽재우의 휘하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화왕산성에 입성하여 성을 지켰다.[출처 필요] 12월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권율의 휘하로 울산성 전투에 출전하여 종군하던 중 출신(出身)[5] 1인, 군정(軍丁) 1명과 함께 처형당했다.[6]
사후
사후 배대유(裵大維)가 상소를 올렸고,[7]1692년 합천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재종형 전우(全雨), 재종질 전영(全榮)과 함께 배향되었다.[8]1880년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출처 필요]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전두환(全斗煥)의 13대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