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539년(가정 18년)에 유왕(裕王)으로 봉해졌다. 가정제의 만년기, 명나라는 내정의 혼란뿐 아니라 「남왜북로(南倭北虜)」라 불리던 왜구와 타타르의 침공에 노출되어 있었다. 융경제는 즉위 후 가정제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가정제 시대에 간언을 하여 죄인이 되어 있던 서계, 해서 등의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그때까지 조정에서 권세를 누리던 도사들을 일소했다. 또 피폐한 국고를 재정비하기 위해 해외 무역을 개방하면서 왜구, 타타르 오랑캐족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무역을 인정하는 유연책으로 대외적으로도 안정되었던 시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융경제 자신은 그저 평범한 황제로, 재위 5년간 친정을 하다가 재위 말년에 결국 1572년2월 29일을 기하여 재상 겸 집정대신 장거정 공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등 정무는 대학사에 의해 처리되고 있었다. 또 주색에 빠지고 향락을 추구하는 바람에 1572년7월 5일을 기하여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