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군 이의(原川君 李宜, 1433년 3월 2일(1433-03-02)~1476년 5월 24일(1476-05-24))는 조선 시대의 왕족(종실)이며, 성녕대군 이종(1405년 8월 12일~1418년 3월 20일)의 양차자(養次子·1460년 3월 11일 출계 및 사후 입양)이기도 한데, 그의 친가 동복 적출 친숙부는 세종 이도(1397년 5월 15일~1450년 3월 30일)이기도 하다.
생애
일생
세종대왕 이도(1397년 5월 15일~1450년 3월 30일)의 친질(친조카)이기도 한, 그의 본관(관향)은 전주(全州)이고, 생부 효령대군 이보(1396년 1월 6일~1486년 6월 12일)의 적6남(嫡六男)으로 출생한 그는, 1441년(세종 23) 5월 7일 9세 당시에 배천 조씨 부인과 결혼했지만 수년 후 1446년(세종 28) 4월 10일 14세 당시에 첫부인을 병으로 인해 사별하면서, 1447년(세종 29) 2월 4일 15세 당시에 한양 조씨 부인과 재혼했고, 28세 시절이던 1460년(세조 5) 3월 11일 당시에 당시 숙부 성녕대군 이종(1405년 8월 12일~1418년 3월 20일)의 42주기를 9일 앞두고 양자(養子)로 출계[1] 조처되었다.
애초 당시의 그는 처음, 아직 3세 어린 시절이었었던 1435년(세종 17) 3월 3일 당시에는 원천윤(原川尹)으로 책봉되었고, 갈수록 자라면서 13세로 장성하여 1445년(세종 27) 5월 15일 당시에는 중의대부 원천윤(中義大夫 原川尹)에, 1459년(세조 4) 8월 3일 당시에는 27세로 승헌대부 원천경(承憲大夫 原川卿)에, 이듬해 1460년(세조 5) 7월 4일 당시에는 28세로 가덕대부 원천경(嘉德大夫 原川卿)에 거듭 개봉되었으며, 1466년(세조 11) 2월 4일 당시에는 34세로 다시 원천군(原川君)에 마지막 진봉(개봉)되었다.
그토록 숙부 세종과 종형 세조의 총애가 대단히 각별키도 하였던 왕족 종실 원천군 이의(原川君 李宜)는 그저 다분히도 천성(天性)이 총명온아(聰明溫雅)키도 하시고 재학(才學)을 겸비하기도 하였으며 그토록 지행(智行)이 상당히 단정(단아)키도 하였으나 갈수록 병약하던 군(君)은 1476년(성종 7) 5월 25일, 병으로 인하여 44세로 졸하였다.
원천군 이의 공(公)의 행장(行狀)의 문장(文章)은 다음과 같다.
성종 7년(1476년) 5월 25일 . 기사
원천군(原川君) 이의(李宜)가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전례(前例)대로 하였다. 이는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여섯째 아들이다. 처음에는 중의 대부(中義大夫) 원천윤(原川尹)에 제수(除授)되었고, 천순(天順)503) 기묘년504) 에 승헌 대부(承憲大夫)505) 에 초수(超授)506) 되었으며, 경진년507) 에는 가덕 대부(嘉德大夫) 원천경(原川卿)에 초승(超陞)되었다. 그리고 성화(成化)508) 병술년509) 당시에 원천군(原川君)에 다시 제수(除授)되었다가, 이제 이 때에서부터 딱 10년 후에 졸(卒)하였는데, 원천군(原川君) 이의(李宜)의 나이는 향년 44세이다. 시호(諡號)는 안도(安悼)인데, 화합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음(好和不爭)을 안(安)이라 했고, 중년에 일찍 죽은 것(年中早夭)을 도(悼)라고 했다. 적실(嫡室)에서는 아들이 없으며, 기묘년(己卯年)[2] 당시에 얻은 기녀 출신의 첩실 홍씨한테 얻음한 모든 얼자(孼子)로서 이해(李偕)는 열산정(列山正), 이정(李偵)은 기성수(岐城守), 이분(李份)은 가은군(加恩君)이다.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