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해적은 해적 중에서 여성의 신분을 가진 이상한 직업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적은 보통 남성의 직업으로 다루어져 있지만, 소수나마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1]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배에서는 모든 선원이 서명하도록 되어 있는 배의 계약으로 여성(어린 소년 뿐만 아니라)이 배에 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2]:303
여성 승선을 허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많은 여성 해적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앤 보니는 칼리코 잭 선장의 배에 타고 있는 동안 남자 옷을 입고 남자로 행동했다.[2]:285 또 다른 여성 해적인 메리 리드와 함께 이런 점에서 종종 독특하다고 여겨진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남동생 스렌드(Thrond)와 싸웠다. 허구의 인물로 여겨진다.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저서 《게스타 다노룸》(Gesta Danorum, 다네스의 역사)에 기록된다. 요하네스 스텐월트프(Johannes Steenstrup)는 그녀를 아일랜드 민속에 등장하는 잉게안 루아드(Ingean Ruadh, 진홍의 여인)와 연결시켰다.[3]
노르웨이의 왕 콜러(Koller)의 누이. 유틀란드의 왕 호르웬딜(Horwendil, 훗날 Amleth/Hamlet의 아버지가 된다)이 해적이 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자, 콜러는 해적을 죽이는 것이 명예로운 업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해적 선단을 찾아 항해에 나섰다. 호르웬딜은 콜러를 죽였지만, 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숙련된 전사였고 경험이 많은 해적이었던 셀라를 죽여야 했다.[3] 《게스타 다노룸》에 기록되어 있다.
그레인느 니 마일레는 우마일(Umaill)의 여왕으로, 오 마일레 일가의 족장이자 16세기 아일랜드의 유명한 해적이었다. 그녀는 아일랜드 민속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6세기 아일랜드 역사의 역사적 인물로, 때때로 "코너트 바다의 여왕"(The Sea Queen Of Connaught)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전기들은 역사학자 앤 챔버스(Anne Chambers)에 의해 주로 20세기와 21세기에 쓰여졌다.
사이이다 알 후라(Sayyida al Hurra) (풀네임은 Sayyida al-Hurra ibn Banu Rashid al-Mandri al-Wattasi Hakima Tatwan)
알제리의 투르크 해적인 바르바리 해적들과 연합해 알 후라는 지중해 서부를 지배했고 바르바리 해적들은 동부를 지배했다. 또한 테투안(Tétouan) 일대의 지배자이기도 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루어진 에스파냐의 레콩키스타로 인해 그녀의 가족들은 그가 젊었을 때 그라나다에서 모로코로 도망쳐 왔고[4] 이는 훗날 기독교인에 대한 복수의 한 형태로써의 그녀의 해적 행위에 동기를 부여했다. 그녀는 학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자라 어린 나이에 테투안 총독과 결혼했고[5]1515년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 통치자 역할을 하면서 이슬람 역사상 최후이자 합법적으로 '알 후라' 또는 '여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모로코의 왕 아흐메드 알 와타시(Ahmed al-Wattasi)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에도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테투안을 떠나는 것을 거부했다. 이 결혼은 모로코 역사상 국왕이 수도인 페즈 바깥에서 결혼한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6][7] * 알 후라는 알 자지라의 카운터로서 사용되며 미국 아랍어 해적 라디오 방송국 이름이기도 하다.
메리는 서퍽(Suffolk) 일대에서 활약하던 해적의 딸이었다. 똑같이 해적 출신인 메리의 남편 헨리 킬리그루(Henry Killigrew) 경은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해군 제독이 되어 해적 진압의 임무를 맡았다. 남편이 바다에 갈 때마다 메리는 자신의 성인 콘월 아르웬낙(Arwenack) 성의 관리들을 선원으로 삼아 해적 행위를 벌였는데, 여기에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방조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1570년, 그녀는 팰머스(Falmouth) 앞바다에서 독일 상선을 나포했고 이를 팔아넘기기 위해 그녀의 선원들이 아일랜드로 왔는데, 마침 배의 선장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친구였고, 그는 메리를 체포하여 론캐스턴(Londceston)의 순회재판소에 고발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녀가 사형을 선고받은 뒤 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사면받았다고 말하지만 이는 다른 가족과 혼동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그녀의 가족들이 배심원들에게 뇌물을 주어 무죄 판결을 받았거나, 혹은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일부러 그에게 짧은 징역형이 내려지도록 손을 썼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이후 그녀는 해적질을 포기하고 몇 년 후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약탈한 물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8]
엘리자베스는 남편 존 경과 함께 팰머스 항구의 펜데니스(Pendennis) 성에 살았다. 1581년 초 에스파냐 선박인 산 세바스찬의 마리(Marie of San Sebastian) 호가 해협에서 폭풍우에 난파되어 팰머스 항구로 피신했는데, 엘리자베스는 그 배를 공격해 싣고 있던 재물을 압수했다. 엘리자베스는 나중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사면되었다. 그녀의 남편 존 경은 추밀원으로부터 배의 소유주에게 선박과 물품을 반환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선박과 함께 잠적해 버렸고, 이로 인해 이후 8년 동안 행해진 해적행위로 몇 건의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9]
카리브해 해적과 후에 토르투가가 폐쇄된 뒤에 미시시피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안느의 이름에 붙는 디우 르 브(Dieu-le-Veut)는 프랑스어로 '신의 뜻대로'라는 뜻으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신이 그녀에게 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처음에 해적과 결혼하였으나 1683년 남편을 살해하고 해적 로랑스 드 그라프(Laurens de Graaf)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로랑스는 거절했고 안느는 그의 관습상의 아내가 되어 곁에서 싸우며 그의 지휘권을 나눠 가졌다.
↑Mourtada-Sabbah, Nada; Gully, Adrian (2003). “'I Am, by God, Fit for High Positions': On the Political Role of Women in al-Andalus”. 《British Journal of Middle Eastern Studies》 30 (2): 183–209. doi:10.1080/1353019032000126527. ISSN1353-0194. JSTOR3593222.
↑Lebbady, Hasna; ﺍﻟﻠﺒﺎﺩﻱ, ﺣﺴﻨﺎﺀ (2012). “Women in Northern Morocco: Between the Documentary and the Imaginary / النساء في شمال المغرب: بين ﺍﻟﺘﺴﺠﻴﻠﻲ ﻭﺍﻟﺘﺨﻴﻴﻠﻲ”. 《Alif: Journal of Comparative Poetics》 (32): 127–150. ISSN1110-8673. JSTOR41850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