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호(享保) 4년(1719년) 음력 2월 27일, 5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사의 장남인 쓰가루 노부오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노부오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1731년음력 5월 16일, 노부히사가 은거하자 그 뒤를 이어 번주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재임할 때 해일, 홍수, 대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연이어지고 흉작이 계속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번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절약과 쌀 대여 제도 등을 중심으로 한 번정 개혁을 단행했다. 노부아키는 부호들로부터 돈을 징수하여 농민들을 구휼하고 소송함을 설치하여 의견을 널리 수용하였다. 또 난학을 중심으로 한 문무 학문을 장려하는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폈다. 그러나 1744년음력 5월 11일, 히로사키에 큰 화재가 발생하고, 25일에는 노부아키마저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면서 개혁은 좌절되었다. 장남인 노부야스(信寧)가 그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