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金)이고, 휘는 정명(政明)이며, 자는 일초(日怊) 혹은 일소(日炤)이다.[1]문무왕(文武王)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이다. 665년 8월 태자에 책봉되었고, 음력 7월 2일에 선왕(문무왕)이 사망한 5일 후인 681년 음력 7월 7일에 즉위하였다. 삼국 통일 후에 국내의 통치 기반을 굳히고 귀족들의 노동력 징발권을 회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였다.[2]
생애
문무왕과 자의왕후 김씨의 차남으로,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장남 효소왕이 6세의 나이에 즉위한 점을 고려하면 사망 당시 장수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3] 교서에 자신을 보잘 것 없는 몸이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1] 체격이 작은 편으로 추정된다. 665년 8월 동복 형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죽자 태자에 책봉되었다. 681년 8월, 왕비 김씨의 아버지인 소판 김흠돌이 김흠돌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정희(政姬)의 아들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실패하였고 처형되었다. 그의 딸 역시 폐위되었다. 즉위 한 달 만에 발생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면서 신문왕은 진골 귀족을 숙청하였고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683년 일길찬 김흠운의 딸(신목왕후 김씨)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682년 6월, 국학(國學)을 설립[4] 하여 예부에 소속시키고, 공장부(工匠府)에 감(監) 1인을 두었다.
683년 10월, 고구려계 유이민이 세운 보덕국의 안승에게 소판의 관직의 등급과 함께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 성을 하사하여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키자, 이에 반발하여 684년 11월, 보덕국이 지배하는 금마저에서 안승의 조카인 대문(大文)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진압하였고 보덕국을 멸하였다.
신문왕은 지방 조직 정비와 지방 통치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고 지방 행정 조직을 강화했다.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고 달구벌로 수도 이전을 계획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5]
687년 5월, 수조권 만을 행사할 수 있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고, 689년 1월 귀족에게서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의 전제화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