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神武門)은 서울특별시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경복궁의 북문이다[1].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으며,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었다.
역사
조선시대
원래 경복궁 건립 당시 북쪽 담은 목책으로 이루어지고 북쪽 문은 없었던 것을 1433년(세종 15년)에 건립한 것이다[2]. 신무문이 건립되면서 경복궁의 4대 문이 모두 갖추어졌다[1].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무문(神武門)이라는 이름은 1475년(성종 6년) 8월 23일 서거정이 후보로 올려 성종이 낙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3][4][주 1]. "신무"라는 이름은 네 방향을 관장하는 동물신 중 북쪽을 담당하는 현무에서 따 온 것이며[5], "신묘하게 뛰어난 무용"으로 풀이되기도 한다.[6]
이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될 때 함께 소실되었다[5].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된 것은 1865년(고종 2년)이며, 중건 당시 현판은 이현직이 썼다[7][1]. 신무문의 성벽에는 온 세상이 태평성대를 누리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 천하가 태평한 봄날과 같다.)"이라는 글귀를 새겨놓았다[6]. 한편 현재의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같다[4].
일제강점기 이후
신무문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그대로 보존되었다[8]. 이후 1954년 경복궁이 일반인에게 개방될 때 함께 개방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군부대(당시 30사단, 훗날의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9])가 경복궁에 주둔하면서 폐쇄되었다. 이후에도 청와대 정문과 마주하고 있어 보안 및 경호 등의 이유로 비공개로 남아있다가, 2006년 9월 29일 당시 대통령이던 노무현의 의지에 따라 집옥재 권역과 함께 개방되었다. 신무문의 개방을 끝으로 경복궁에는 비공개 권역이 사라지게 되었다[5].
1963년 1월 21일 경복궁 전체가 대한민국의 사적 제117호로 지정될 때 신무문도 함께 포함되어 지정되었다[10].
용도
신무문은 음기가 강하다는 이유로 평소에는 닫아두었다가, 비상시 또는 왕의 비밀 행차 때나 사용하였다[11]. 그밖에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한 회맹단이 있어 왕이 회맹제[주 2]에 참석할 때에 주로 이용하였고,[12][13][14]영조가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에 참배할 때 경복궁터를 길로 삼으면서 신무문을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4]
1519년 기묘사화 당시 중종이 불러들인 훈구대신들이 신무문으로 입궐하였다. 그 까닭에 "신무의 난"으로 칭해지기도 한다.[11]
암문
신무문 인근에는 암문인 계무문과 광무문이 있다. 이들 암문의 이름에는 모두 "무(武)"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15].
계무문
계무문(癸武門)은 신무문 우측에 있는 암문으로, "계무"는 북쪽의 현무를 뜻한다. 1868년(고종 5년)에 건립되었으며, 돌로 만든 월문[16]의 형태이다. 융문당으로 향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건청궁 장안당 북행각의 서북쪽에 위치하며[17], 이 문을 들어서면 건청궁 무청문이 나온다. 실제로 신무문은 궐 밖에서 건청궁으로 바로 통하는 역할을 했던 문이었다. 그밖에 후원에서 문과 시험을 치를 때, 이와 관련한 관리들이 주로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18]. 계무문의 현판은 전서체를 돌에 새긴 금석문의 형태이며, 그 중 "계(癸)"자는 소전으로 조각되어 알아보기가 어렵다[6].
광무문
광무문(廣武門)은 계무문 우측에 있는 암문이며, 계무문처럼 돌로 만든 월문의 형태이다. "광무"란 "무용을 넓힌다."라는 뜻이며, 그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경농재로 향하는 통로이며, 건청궁 경화문 앞 녹산 언덕에 위치한다[17]. 광무문의 현판도 전서체를 돌에 새긴 금석문의 형태이다[6].
기타
신무문에 주둔했던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신무문 좌측에 713전투경찰대가 상주하는 경호상황실이 세워졌다. 31.36평 규모의 한식 건물이다[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