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앙드레 반 루는 1705년 당시 사보이아 공국의 일부였던 니스에서 태어났다. 반 루는 그의 형 장바티스트 반 루를 따라 이탈리아토리노로 떠났고, 이후 1712년에는 로마로 가서 베네데토 루티와 조각가 피에르 르 그로 밑에서 미술을 배웠다. 1723년 이탈리아를 떠난 후 파리에서 일하며 왕립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는데, 1723년 그곳에서 그림 부문 1등상을 받았고 1727년에는 역사화 부문에서 1등상을 받았다.[2] 후에 그의 라이벌이 되는 프랑수아 부셰 역시 반 루와 같은 경력을 쌓았다. 1724년에 반 루는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
1727년 토리노를 다시 방문한 반 루는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국왕에게 고용되어 토르콰토 타소를 묘사한 일련의 그림을 그렸다. 1734년에 그는 파리에 정착했고 1735년에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3] 빠르게 승진하여 1763년 6월에는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선출 되었다. 퐁파두르 부인과 프랑스 궁정은 반 루를 후원했다. 1751년 그는 생 미셸 기사단 훈장을 받았으며 1762년 6월 루이 15세의 초대 화가로 임명되었다.[3] 그는 궁정 화가로서 큰 성공을 했으며 그의 초상화와 역사화 역시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765년 7월 15일 파리에서 사망했다.[4][5]
작품
그는 위대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연구를 통해 얻은 단순한 스타일과 정확한 디자인을 통해 현대 프랑스 학교를 정제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후에 그의 작품에 쏟아진 찬사는 지금은 부당하고 과도하다고 여겨진다.[6] 그는 개인 후원가와 궁정인, 고블랭 공장, 교회 구성원 등 많은 이들에게 후원을 받았다. 그 후 몇 세기에 걸쳐 반 루의 명성은 곤두박질쳤지만, 그의 실력은 여전히 훌륭하다고 평가 되며, 그의 작품의 질과 다양성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성모 마리아의 결혼》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7][8]
그림
《회화》, 1752년~1753년
《건축》, 1752년~1753년
《조소》, 1752년~1753년
《음악》, 1752년~1753년
《사도 안드레아》
《Innocente Guillemette de Rosnyvinen de Pire의 초상》, 176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