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첫 수필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성La Barbarie à visage humain>의 출간과 함께, 레비는 여러 정치적, 외교적, 사회적 문제에 참여하며 프랑스 정치계, 철학계, 언론계, 문학계에 있어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1970년대 신(新)철학 운동의 주창자이자 이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서, 레비의 활동, 의견, 출간은 특히 프랑스에서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극작품과 두 소설을 쓴 작가로서, 레비는 1984년 메디시 상을, 1988년 앙테랄리에 상을 수상했으며, 컬럼니스트이자 영화인으로서는 2000년 베니 레비와 알랭 핀켈크로트와 함께 레비나스 연구 기관을 창설하기도 했으며, 1990년부터는 <게임의 법칙>이라는 잡지를 편집해왔다.
레비는 학계, 정치계, 언론계, 예술계에 있어 수많은 비평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같은 비평들은 주로 레비의 철학서, 지지 성명, 지정학적 문제에 대한 활동 및 그의 자세와 인물 자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생애
가족
1968년부터 1979년까지
베르나르앙리 레비는 리세 파스퇴르 드 뇌이에서 고교 과정을 마쳤으며, 이후 2년간 리세 루이르그랑에서 2년간 그랑제콜 준비 과정을 했다.
"베르나르는 항상 BHL이었다. 1968년, 내가 입학하고 일 년 뒤, 베르나르가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을 때, 정말로 그를 처음 보게 되었다. 확실하게도, 베르나르는 능률과 재능을 가졌으며, 엄청 공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첫 시험에 합격하였겠는가? 하지만 그는 대학에서 내준 과제를 가장 먼저 하려고도, 무엇보다 우선하여 해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만의 계획을 짰다. 출판하고, 비극적인 일들을 알리고, 때로는,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자 했다. [...] 베르나르는 대학 교수가 되는 데 있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부족했던 것은 시기심이었다. 하지만 베르나르는 메를로퐁티나 훗설보다, 카뮈와 말로를 향하여 목표했다.[1]"
1971년 9월, 레비는 북아일랜드에 관한 긴 르포와 더불어, 마오주의적 문제 제기를 통하여 프랑스 농촌의 계급 투쟁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프랑스 농민 계층에 관한 연속 기사를 <콩바Combat>에 기고한다.
루이 알튀세르와 친분이 있던 경제학 교수 샤를 베텔하임의 추천으로, 레비는 인도아대륙, 특히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 전쟁이 벌어지던 방글라디시로 여행을 떠난다. 1973년 5월, 여행에서 돌아온 레비는 첫 저서, <혁명하의 방글라데시 민족주의Bangla-Desh Nationalisme dans la révolution>를 집필한다. 이 첫 저서는 레비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 르포 연작이다.
프랑스로 돌아오고, 레비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강사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인식론을 강의한다.
↑Rémy, Rieffel (1993). 《La Tribu des clercs》. Paris: Calmann-Lévy.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sous-titre= (도움말), lui-même donnant comme source le Bulletin officiel de l’éducation nationale/ Mouvement du personnel, pour l’année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