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해병대(美合衆國海兵隊, 영어: United States Marine Corps, USMC) 또는 줄여서 미국 해병대(美國海兵隊, 영어: U.S. Marines), 미해병대(美海兵隊)은 미군 중 전력투사(power projection)을 위한 상륙 작전, 타국 원정 및 기동 작전을 수행하는 군종으로, 2020년 시점 180,958 현역병을 보유하고 있다.
85문의 대포와 1,230명의 미 해병대 병력을 싣고 1871년5월 16일 일본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한 미국 군함 5척(기함은 프리깃함인 콜로라도호, 순양함 2척, 전함 2척)이 6월 1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면 전쟁이 최종목적은 아니고, 무력시위를 하여 개항을 하게 하려는 포함 외교가 목적이었다.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과 동생 어재순을 비롯해 240명 전사, 100명 익사, 20명 포로로 잡혔으며, 미 해병대는 3명 전사, 6명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미군은 군함의 무력시위로 개항을 하게 하여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전통적인 포함외교의 목적달성은 실패하여, 시장 개방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철군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1 해병 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인민해방군 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퇴각에 성공한 전전이다. 이북사람 10만명이 남한 지역으로 탈출하게 된 전투이다.
1950년 11월 영하 40℃의 혹한에서 18일간 벌어진 장진호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전사(戰史)의 2대 극한 전투이며,[2]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미군 사상 최악의 희생을 기록했던 장진호 전투에서만 미네소타주 출신 미군이 4000명 이상 숨졌다.[3]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1 해병 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한다.[1] 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