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은 879년(헌강왕 5) 지증대사가 창건한 봉암사의 극락전이다. 935년(태조18) 정진대사가 중창 하였으나 임란을 거치면서 극락전과 일주문만 남기고 그 많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중수공사가 있었는지 망와에 소화 16년(1941)이란 명문이 남아있다. 기단은 탑과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상·하 갑석은 면석으로 처리하였고 기단바닥은 장방형 판석을 깔았다.[3]
처마구성은 하층인 경우 각연을 사용하여 홑처마로 구성하고 상층은 겹처마로 처리하면서 처마곡을 크게 잡았다. 그리고 지붕은 모임지붕으로 처리하면서 정점에 화강석으로 만든 상륜부를 올려 탑의 요소를 모두 갖추게 하였다.[3]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시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로 전하고, 현재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일제강점기때 옥개보수가 있은 듯 망와에 소화 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2]
장흥 보림사와 함께 유이하게 현존하는 선문구산인 봉암사에서 극락전은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다. 그 형태나 위치로 보아 조선 중후기에 세워진 왕실 원당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단과 초석은 고려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높은 단층 몸체에 차양칸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 같은 외관을 구성했고, 몸체와 채양칸의 기둥열을 다르게 한 독특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2]
독특한 외관과 건축수법 및 단청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국가지정 문화재(보물)로서의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