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이와모토가 2대 교장이 되었다. 이와모토도 개신교도였지만 교내에 종교를 의식하지 않고 미션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 앞에 평등한 남녀가 건전한 가정을 영위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학생들에게 요구했다. 교사와 기숙사는 낡았고 학생들의 복장도 검소했다. 운영위원회에는 학생도 참여했고, 기숙사는 자치제였다. 전국에서 양갓집 자녀들이 입학하러 모였고, 오오츠카 나오코처럼 남편이 해외 유학이나 출장을 간 중에 입학하기도 했다.
1892년 학교를 고지마치구 로쿠반정(현 지요다구 로쿠반정)으로 이전하고 학생 수가 300명에 달하는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교회와 선교사의 경제적 원조를 받지 않아서 경영은 불량해졌다. 1896년 2월 심야의 실화로 교사・기숙사・교원사택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초미의 피난 와중에도 메이지 여학교 학생들은 의복이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타다 남은 교사에서 토가와 야스이에, 사쿠라이 오손 등이 수업을 계속한 후, 1897년(메이지 30년) 도쿄부키타토시마군 스가모(현 도시마구니시스가모 2정목)에 교사를 신축했다. 1904년 이와모토는 교주(校主)로 물러나고 기숙사 사감이었던 쿠레 쿠미(쿠레 아야토시의 누이)가 교장이 되었지만,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909년 폐교했다.
치요다구 로쿠반정 3정목 1번지와 토시마구 니시스가모 2정목 14-11번지에 과거 메이지 여학교가 있었다는 기념표지판들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