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6월에 함대사령관으로 승진하고 1841년에는 브루클린 해군공창의 사령관이 되었다. 증기선을 주력으로 하는 해군의 강화책을 진행함과 동시에 사관교육의 임무를 맡아‘증기선의 아버지’라고 칭송받는다.
일본 개항
1852년3월 동인도함대의 사령장관에 취임했고 제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에 의해 미국과의 통상을 위해 필요하다면 포함외교를 써서라도 일본을 개항하라는 임무를 받았다.[1]
증가하는 미국-청나라 교역, 일본 근해의 미국 포경선 존재, 그리고 아시아 잠재 석탄보급지들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한 독점증대, 이것들이 미국의 새 통상지를 개척해야 할 요인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명백한 운명’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낙후지로 인식되는 아시아에게 서양 문명의 혜택을 강요하고자 했다. 일본은 페리의 내항에 대해 네덜란드로부터 사전경고를 받았는데 250년간 지속해 온 쇄국정책을 당연히 꺼려했다.[2]
7월 14일에 막부 측이 지정한 구리하마에 호위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도다 우지요시와 이도 히로미치에게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구체적 협의를 진행하지는 않은 채 개국을 요구했으며, 막부 내 사정을 받아들여 다음 해(1854) 7월 까지의 만 1년의 협상유예에 동의했다. 그후 며칠간만 측량한 후 보급 등 함대의 사정으로 류큐로 돌아가 기항했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미국에 극동사정이 전해지는 중이던 1854년 2월에는 만 1년이라는 협상유예 약속을 깨어 버렸다. 2월 13일에 기함 서스케하나 호(en) 등 군함 10척과 해군 1,600명을 이끌고 현재의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요코하마시가나자와구(金沢区) 앞바다에 육박해 입항을 강요했다. 3월 8일에 입항하고 조약체결을 요구하여, 3월 31일에 요코하마에서 가나가와 조약을 조인했다. 또 그 후, 나하에 기항하여, 7월 11일에는 류큐 왕국과도 미류수호조약을 체결했다.
귀국한 후에는 각 나라의 원정기를 작성하였다. 말년의 사진을 보면 가발을 착용하고 있다. 1858년에 간암으로 사망하여 출생지 뉴포트의 아일랜드 묘지(영어판)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