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젤라는 브루니드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 백작브루노 폰 브라운슈바이크와 결혼했다. 그는 하인리히 1세의 큰아버지인 브루노의 후손인 브루니드의 후예였다. 브라운슈바이크 백작 브루노 폰 브라운슈바이크에게서는 프리지아의 후작 리우돌프와 두 명의 딸을 얻었다. 브루노 폰 브라운슈바이크와의 첫 결혼 이전에 벨프 가문의 헤르만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정식 결혼관계는 아니었다.
브루노 폰 브라운슈바이크가 죽자, 1002년 바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변경백을 지낸 레오폴트의 아들 바벤베르크 가문의 에른스트와 재혼하였다. 이 재혼에서 에른스트 2세, 헤르만 4세를 얻었다. 루게릭병을 앓다가 자녀 없이 사망한 기젤라의 오빠 헤르만 2세의 후임으로 그의 두 번째 남편 에른스트가 슈바벤 공작이 되고, 이어 두 아들에게로 이어졌는데, 1033년 3월 2일 슈바벤 공작위를 계승한 헤르만 4세가 아들 없이 죽으면서, 이 자리는 후일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로 넘어간다.
기젤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에도 관여하여 제국 의회에도 개입하였다. 기젤라는 자신의 외삼촌 상부르고뉴의 왕 루돌프 3세를 상대로 상속권을 주장하여, 자신의 남편 콘라트 2세에게로 가게 했다. 또한 기젤라는 교회의 여러 행사, 모임에 참석하였다. 기젤라는 언니 마틸다의 두 딸 소피와 베아트리체가 상속권을 주장할 것을 대비하여, 각각 멀리 이탈리아의 바르 백작과 토스카니 후작에게 시집보냈다.
태후와 사망
1039년 세 번째 남편 콘라트 2세의 사망을 보았다. 그러나 1043년 2월 기젤라는 이질에 걸려 고생하다가 2월 14일 또는 2월 15일 투르에서 사망했다. 기젤라는 고슬라 황궁에 있는 슈파이어 대성당의 황실 묘소에 안치되었다. 1900년에 후에 발견된 그녀의 석관에서는 미라화된 기젤라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시신에는 납 함유량이 발견되었으며, 긴 금발머리에 172cm 전후의 키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젤라는 아름답고 영리했지만 다소 오만한 인물이라는 평을 얻었다.
각주
↑중간에 983년 리우트폴트 가문의 하인리히가 바이에른을 차지하고 새로 공작이 되었으므로, 후일 황제가 된 하인리히는 바이에른 공 하인리히 3세가 아닌 4세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