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식민지 왕립 공증인인 피에르 기용(Pierre Guillon)과 자유 유색인 여성인 마리프랑수아즈 뒤프페이(Marie-Françoise Dupepaye) 사이에서 혼외자로 태어났다.[1] 그와 그의 누이 앙드레즈는 1794년 흑색법(Code Noir)이 폐지될 때까지 법적인 자녀로 인정받지 못했다.
1774년, 기용레티에르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그를 프랑스로 데려갔고, 기용레티에르는 루앙에 위치한 새로운 무료 공립 그림 학교에서 화가 장바티스트 데캉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letier"(세 번째, 즉 "세 번째 아들"을 의미)에서 유래한 "레티에르"(Lethière)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그는 3년 동안 루앙에 머물렀다가 파리로 가서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서 1786년까지 가브리엘 프랑수아 두아이앙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2] 그 당시 그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다.
그는 1784년 로마 대상에서 《그리스도 발치에 있는 가나안 여인》이라는 그림으로 2등을 했다. 2년 후, 그는 다시 로마 대상에 참가하여 비록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로마로 유학 갈 수 있는 지원을 받게 되었고, 로마에서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더욱 발전시키게 되었다. 1787년에 그는 마리아가트 라포트르(Marie-Agathe Lavoine)라는 여자를 만나 혼외정사로 아들 알렉상드르(Alexandre)를 낳았다. 1792년에 그는 파리로 돌아와 자신의 회화 스튜디오를 열었으며[3] 로마에서 제작한 그림으로 1795년 파리 살롱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1799년에 그는 과부 마리조제프오노레 방젠(Marie-Joseph-Honorée Vanzenne)과 결혼했다. 그는 방젠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딸 외제니를 의붓딸로 두었으며 외제니 역시 화가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새로 임명된 뤼시앵 보나파르트 대사와 함께 스페인으로 건너가 미술품 수집을 도왔다. 보나파르트의 추천으로 그는 1807년 로마 아카데미 드 프랑스의 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816년 루이 18세의 명령으로 교체될 때까지 역임했다.[4]
↑Simon Lee, "Lethière [Lethiers; Letiers], Guillaume [Guillon]", Grove Art Online보관됨 2008-08-21 - 웨이백 머신, Oxford University Press, [14-02-2007]
↑François Fossier, Les directeurs de la Villa Médicis au 19th century. Correspondance de Guillaume Guillon-Lethière (1807-1816), Paris, L'Harmattan, 2018, 466 p. ISBN978-2-343-14709-3